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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12. 느들은 사랑을 저질렀구나

by 조유상

'어느 커플에게'


상아

일아

느들은 아이들처럼

사랑을 저질렀구나


바다를 주름잡는 파도처럼

들녘을 휘모는 바람처럼

느들이 세상을 좀 살었니

그러나 사랑은 뉘게나

첫 시도인 것을


들국화 만개한 언덕에서

산들바람 서성이는 달빛 아래서

느들은 한 폭의 그림이어라


소꼽모아 살림차리고

흙풀모아 밥반찬 만들어

시덕거리고 머리 부딛며

그래, 잘 살거라


상아

일아

느들은 아이들처럼

사랑을 저질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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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그의 선배 한 분이 풀무학교로 찾아와, '조 선생 잠깐 나와 봐요.' 하며 학교 운동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무슨 일이실까? 궁금해 따라간 운동장에는 가을이면 전통으로 내려오던 풀무제 행사 중 하나인 국화제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국화 중 하나를 고르라신다. ?


어릴 적 엄마가 가을이면 국화를 화분에 심어 뜰 계단에 줄지어 다복하게 긴 눈물방울 모양으로 내려 키운 걸 떠올리고 자잘한 국화가 길게 늘어진 모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분은 코팅해 가져온 시를 그 화분 끝에 매달아 주셨다. 우리 결혼 선물이라시며. 마음 몽글몽글해지는 그 시가 이것이다. 교사자격증 따윈 없어도 좋을 시절, 그분은 풀무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하시기도 했다. 그분 막내아들은 내가 풀무학교에서 근무하던 때 나랑 손톱에 봉숭아물을 같이 들이던 녀석 중 하나였고, 당신이 직접 쓴 시를 막내아들 시켜 코팅을 해 오신 거였다.


덕분에 우리는 결혼 전후 숱하게 동료교사들로부터 오가며 놀림을 받았다. '상아 일아 느들은 아이들처럼 사랑을 저질렀구나!' 복도에서고 어디서도 '상아 일아!' 는 심심풀이 동네북처럼 불리웠다. 우리 사랑은 축제 한 가운데 있었고 동네 잔치였다.


이 시는 우리의 첫집에서부터 지금까지 빛바랜 사랑만큼 낯빛 변해도 한세월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사랑은 그리 느닷없이 시작되고 36, 39에 불붙은 사랑은 오래 잉걸불처럼 이어졌다.




#풀무학교 #잉걸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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