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소꿉놀이
나이가 제 아무리 많이 먹음 뭐 하나. 콩과 보리도 구별할 줄 모르진 않았지만 여전히 숙맥이던 나는 살림 하나 장만해 오지 말라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엄마가 동대문시장에서 다리미방석 세트며 그릇세트를 사 줄 때 그가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고 했다며 엄마랑 싸우기도 했다. 엄마는 뭐 가지고 밥 해 먹을 건데? 혀를 찼고 나는 우리가 알아서 할 건데 하며 투닥이다 그가 일하는 직장에 전화를 해, 엄마가 자꾸 살림을 챙겨줘 싸우고 있다니까,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하니까 일단 주시는 것만 받으란다. 왜 사람이 이 말했다 저 말하느냐고 하니 그가, 그래야 좀 덜 준비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조금만 준비하라 말할 것이지 아무것도 해오지 말라더니 왜 사람이 말을 바꾸느냐고 서럽게 묻던 나. 이런 사람을 만나 그는 어떻게 이 여자랑 살 건가 막막하지 않았으려나?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귀 밖에 없던 시절이다.
함께 살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다 결국 찾아낸 집은, 그와 나의 직장 풀무신협과 풀무학교에서 가까운 홍동 감리교회 옆이었다. 나는 걸어서 샛길로 학교 창고 쪽을 돌아나가면 되고 그는 회색 프라이드로 짧은 거리를 타고 가면 되는 산 바로 밑에 집. 쥔은 우리가 살게 될 옛집을 두고 앞에 새집을 지어 나갔으니 마침 비어있었다. 우리 작은 키가 방 안쪽 끝으로 들어가면 키에 닿고야 마는 방방방부엌인 일자형 집에 마당엔 콘크리트로 발라져 있고 삐그덕 대는 형식적인 대문과 반대편은 그냥 허술한 문이 달린 집이었다. 살기 전 주말을 이용해 우리 둘은 도배를 하기로 했다. 도배하기 전 그는 신문지로 하면 된단다. 엥? 밥상은 안 사냐니까 신문지 깔고 먹으면 된다더니, 뭐 신문배달부야, 신문사 홍보직원이야 말끝마다 신문지면 다 만사형통이라니...
'신문지로 도배하면 얼마나 재밌는데, 이쪽을 보고 누우면 배 아플 땐 훼스탈, 저쪽을 보면 만화도 있고'하는 게 아닌가. 아우, 정말 신문지로 할 모양이네, 생각하다 이건 좀 아니지 싶어 한지로 합의를 보았다. 거뭇거뭇 이빨새에 김가루 낀 것 같은 당시 카페 같은 데 유행하던 연한 미색 한지를 사다 바르기로 했다. 풀은 파는 걸 사다가 물 섞어서 쓰기로 하고 덕지덕지 붙은 옛 도배지를 떼내고 누런 초배지를 바르는데 발라 본 적이 없으니 엉망이었다. 초배지는 괜찮았지만 한지에 풀칠해 들어 올리기만 하면 주욱 찢어지기 일쑤여서 나중엔 반씩 잘라 붙이는 요령도 터득했다. 둘이 그 작은 방들을 바르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어서 깔깔대고 웃으며 시작해 나중엔 지쳐서 아무 말 없이 묵언수행하듯 겨우 끝내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집이 원체 낮다 보니 큰오빠가 사준다는 장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었다. 3칸짜리 주니어옷장을 사달라 해서 그걸 맨 끝방에 넣는데 그것도 높아서 간신히 천장 도배지를 오리고 넣고 다시 이어 붙여야 했다.
그렇게 집을 마련하고 수채구멍 막는 마개며 빗자루 몽둥이까지 하나씩 최소로 필요한 살림을 장만했다. 그중 젤 큰돈을 들였던 건 단연 인켈 전축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우리로선 최대의 호사를 마련한 셈이었다. 그다음은 전기 압력밥솥, 당시로 무려 38만 원인가로 기억하는데(아닐 수도 있다) 우리 살림으로선 너무 비싸서 숫자에 약한 내 기억에도 남아 있나 보다. 부엌 바닥은 바람이 휑휑 앞뒤로 자유분방히 드나드는 허술한 나무칸으로 되어 있어 부엌만 입식으로 바꾸기로 했지만 부엌에 있던 가마솥과 아궁이 하나 만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 하나에 저녁이면 장작불 지펴 물을 덥히고 잔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 먹으면 얼마나 구스름하고 좋겠어? 하는 내 간청에 한쪽면엔 입식 싱크대가, 안방 쪽에는 가마솥 하나가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물론 많이 써먹진 않았지만, 우리 부엌에 반들하게 윤나는 까만 가마솥은 마치 조왕신을 모시고 사는 기분이었고 부엌이 비로소 아름답게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우린 이 작은 부엌에서 저녁을 해 먹고 다정히 이마를 맞대고 하루 일상을 나누며 시시덕거리고 때론 음악을 틀어놓고 둘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도 했다. 감자를 구워 먹기도 했고 결혼초부터 시시때때로 불시에 들이닥치는 식객들과 손을 맞아들이기도 했다. 결혼식 때 강당에 색도화지 두른 국화꽃을 주르륵 놓아주셨던, 농업을 가르치던 오 선생님은 갑자기 드르륵 문을 열고 나타나 '잘 사나' 확인 시찰 수시로 하셨고, 주례사를 맡아주던 이번영 선생님은 긴 목을 쭉 빼고 들어와 담근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은 매실주를 '그냥 따~'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다. 문턱 낮은 부엌을 가진 지붕 낮으막한 집은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소책자를 아는가. 쟝 러끌레르끄가 쓰고 장익 주교가 스승의 책을 번역한 얇디얇은 <게으름의 찬양>에 나오는 피정의 집을 나는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 책에 보면 피정 오는 손들에게 들어서면 보이는 문구가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집 안쪽에 주인(성체)이 있고 먹을 것은 언제든 자유로이 꺼내먹을 수 있으며 다음 사람을 위해 채워놓고 정돈해 주고 떠나길 바라는 글귀였다. 나 역시 부엌문에 '이 집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배고픈 이들은 언제든 먹을 것을 자기 집처럼 드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붙여두고 살았었다. 우리가 버는 건 초라했지만 나눠먹을 만큼이야 안 되겠는가 라는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으니까.
우리 둘은 넘치게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웃들과 나눠먹을 만하게, 약간 부족하게만 주어지길 바라고 살아왔다. 누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이야기하지만 그건 우리 생에 있을 거 같지 않았으니 늘 소박하게 곁에 있는 이웃들에게 문을 열고 사는 삶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홍동이란 마을에 깃들여 소꿉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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