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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14.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신혼여행

by 조유상

결혼 전 기숙사에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어느 날, 우리는 배회하다 어쩔 수 없이 여관을 들어갔다. 그 나이에도 어색해서 쭈뼛대며 들어간 여관은 뭔가 냄새도 나고 조짐도 스멀스멀한 게 야릇한 느낌 작렬이었다. 그와 나는 어색하게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는데 말똥거리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채였다. 팔베개만 하고 잘 테니 걱정 말고 자라는 그의 말을 또 순순히 믿기는 했지만 잠이 쉬이 올리 만무였다. 팔베개를 하고 나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그와 나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가 태어나고 여자 팔베개해 준 건 이번이 두 번째란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의 여동생이 애기 낳았을 때 제부는 자기 아이 아니라며 동생한테 오지도 않았단다. 그의 여형제들 남편들은 희한하게 셋 다 의처증이었다. 동생 첫아이 낳을 때 가보고 불쌍해서 팔베개를 해 재웠다는 그의 말, 입증되지 않았어도 믿을 수밖에. 그랬거나 말았거나 그는 내 곁에 있는 사람 아니던가. 살살 어루만지던 손이 멈추며 그와 나는 어느 틈에 소르륵 잠에 빠져들었었다.


아, 물론 헤어지기 아쉬워 차 안에서도 살그머니 그와 몸을 포개고 뜨거운 밤을 보낼 뻔도 했는데 것도 얄밉게 그냥 지나갔다. 그런 경험은 있었지만 그 흔한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덕산 온천호텔로 출발했다. 한 5분여 달려 금마에서 홍성으로 꺾어지자 그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도통 신경 쓰여서'라고 하더니 친구들이 낡은 그의 차 윈도브러시에 걸어두었던 오색 테이프와 깡통 따위를 휘리릭 걷어 트렁크에 때려 실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가 봐도 신혼의 파릇함이 묻어 있는 얼굴이 아니었을 테니.


그와 결혼식을 앞두고 풀무학교에서 피로연 할 그릇을 빌리러 갔을 때였다. 사장님은 그의 얼굴을 보며 "아드님이 결혼하시나 보죠?" 하는 게 아닌가? 우린 동시에 마주 보며 푹 웃어버렸다. 그릇점을 나와 걸으며 그가 말했다. '사장님이 영 장사를 못하시네 그랴~' 둘째를 낳아 안고 다닐 때 사람들은 그더러 손주냐고 물었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트렁크에 갓 결혼한 표시를 쑤셔 박아놓고 덕산을 간 우리. 첫날밤은 고스란히, 아주 얌전히, 고대로 자고야 말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는 뭔가 울근불근하질 못하는 거였다. 나는 그가 잠들고 나서 숙소 근처를 혼자 야밤에 걸어 다녔다. 그가 39살까지 결혼 못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절망스러웠다. 이제 와 무를 수도 없고 어쩌지? 애기도 못 낳겠네. 그가 곤히 잠든 첫날밤, 살그머니 들어온 나는 혼자 울다 잠이 들었다. 덕산 온천호텔 길엔 내 눈물이 사리가 되어 점점이 박혀 있으리라.


다음날 아침 그와 나는 흐린 얼굴로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내가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독일어를 번역해 주며 몇 달 머물렀던 글라라봉쇄수도원에서 인연을 맺은 신부님을 만나기로 해서였다. 그 신부님은 전주교구 신부님으로 외방선교를 가셨다가 풍토병을 얻어 익산에 있는 글라라수도원에서 요양하셨던 정승현 신부였다. 내게 아버지 같은 분으로 맘껏 어리광도 부리곤 했었기에 가톨릭신자가 아닌 그와 결혼하기 전 상담도 했고 비신자와 결혼할 때 거치는 관면혼배도 부탁해 두었었다. 몸이 많이 나으셔서 전주교구 김제에 계신 걸 알고 찾아갔더니 가볍게 우릴 맞이하시곤 바로 관면혼배를 해주셨다. 그야말로 약식이었지만 신부님은 언제나처럼 가벼움 속에 깊은 신앙을 옷자락 안에 묵직이 지니고 계셨던 분이었다. 수도회신부처럼 청량했던 신부님.


그분은 남편이 당신과 같은 고무래 정 씨라는 걸 아시고는 시조묘가 압해도에 있으니 가보라는 말씀을 툭 던지듯 하셨다. 일정에 없던 목적지 하나가 추가된 셈이었다. 신부님과 헤어져 백양사에서 하루 자고 목포, 내가 살던 유달산 자락 중턱에 있던 수도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신랑과 하루를 머물러 자매들 밥을 얻어먹고 압해도를 향했다. 육로로 연결된 압해도도 처음이지만 시조묘를 찾아가다니, 우리가 언제부터 조상에 연연했다고... 여하튼 조상의 묘소에 도착한 우리는 같이 넙죽 절했다. 기도하는 마음은 오로지 하나,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코미디 같지만 그때 우린,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고 나름 심각했다.


그렇게 남쪽을 훑고 올라온 우리는 친정집으로 향했다. 목포에서 무안으로 넘어가면서도 한 번, 집에 거진 다 가서 세검정에서도 또 한 번 교통경찰에 걸려 딱지를 떼기도 했다. 그때마다 신혼이라고 변명하며 봐달라고 사정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지만, 신랑은 그 말을 못 하게 했다. 누가 봐도 믿지 못할 것만 같아서였을까? 친정식구들 두루 만나고 하룻밤 자고 시댁에 이바지 음식을 해 오고 나서야 일주일간의 긴 신혼여행이 끝났다. 드디어 우리 신혼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에 온 날이 우리의 첫날밤이었다. 키가 나랑 똑같으니 내 드레스 속 구두에 맞춰 결혼식날 키높이 구두를 신었었고, 그동안 연애하느라 두 달간 집중적으로 밤도깨비들처럼 돌아다녔잖은가. 새벽형 인간인 그가 신혼여행 내내 긴 운전에 그동안 쌓인 피로가 어마무시했었단다. 드디어 홈 스위트 홈으로 돌아온 그날 그는 드디어 나를 얼싸안고 맘껏 실력 발휘! 를 시작했다. 하하하. 39년 굶주려온 늑대 본능. '바보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면서. 그 덕에 나는 월요일 출근할 때 목에는 붉은 키스마크를, 입술에는 꽈리처럼 부푼 훈장을 달고 출근하게 되었다는 전설(아아 19금)!





#신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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