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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15. 일상이 시작되다

by 조유상

누구의 몫?


결혼을 하고 나서 첫 출근하던 날. 그는 풀무신협으로, 나는 풀무학교로 출근하느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아침밥을 준비하며 나는 궁금했다. 그의 넥타이를 매 줘야 하나? 사실 나는 그걸 맬 줄도 몰랐고 지금처럼 유튜브가 있어 쉽게 커닝할 수 있는 뭣도 없는 세대 아니던가. 넥타이를 매주며 그의 목살을 잡아당기면서 속으로는, '너는 우리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야'를 눈빛 레이저로 쏘며 입에 발린 말로 사랑한다 하는 짓 따윈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 때도 맞벌이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흔하지는 않았을 때다.


넥타이 생각을 머릿속에 찜 찌듯 굴리며 밥을 준비하는 사이, 어느새 그가 끝방에 가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오는 게 아닌가. 순간, 어? 내 고민거리가 아니었구나! 연속극에서처럼 아내가 넥타이 매 주던 장면은 그러니까, '남자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자기 일을 아내 몫으로 넘겼던 거구나'를 발견하던 아침은 신선하고 홀가분했다. 역시 드라마가 다가 아니야. 그렇게 아침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수저를 놓고 밥과 국을 퍼주면 받아 놓으며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 대개는 설거지를 내가 하고 가지만, 시간에 쫓기면 직장이 가까우니 후다닥 튀어나갔다가 어차피 집에 와서 점심 먹을 때 먼저 오는 사람이 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필요할 땐 각자 알아서 하는 편이었고 해라 마라 식은 아니어서 대체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일일이 하나하나 몫을 따져 왜 안 하느냐 어쩌고 하면 우린 아마 지레 지쳤을지 모른다. 그의 가장 큰 장점 하나가, 고맙게도 일체 생색을 내지 않는다는 거였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나만 학교를 그만둔 상황이었고 그는 풀무신협을 다니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답답했는지 그는 주말이면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아이가 없을 때는 함께 즐거울 시간이 많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주중에 집안일하고 아이 돌보느라 지쳐 있었기에 주말이라도 그가 아이를 봐주었으면 했는데 할 수 없이 따라나서야 했다. 그가 운전을 하니까 나는 아이를 안고 뒤에 앉아 오고 가는 내내 목직한 아이를 돌보아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해서 한번 나갔다 오면 잠시 좋고 길게 피곤했다. 돌아온 나는 지쳐서 집 마루에 아이를 내려놓자마자 파김치가 되곤 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부리나케 짐정리부터 하고 아이를 챙기곤 했다. 그렇게 그렇게 일주일씩 살아냈다. 봉급쟁이들은 일주일씩 버티고 한달 단위로 살아갔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신협가계부엔 다달이 받아왔던 월급봉투가 퇴색한 채 달마다 끼워져 있다.




유혹 앞에서


신협을 다니던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면서 그가 말했다. 낮에 직장에서 다른 데 선물할 화분을 사러 갔었단다. 화분을 고르고 값을 지불하며 영수증을 달라했더니 빈 영수증을 내밀며 알아서 가져가서 쓰라고 했다는 거였다. 그가 잠시 의아해하다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그냥 사장님이 직접 써달라고 해서 받아다 영수처리를 했단다. 아마 그렇게 암암리에 관행으로 해 왔는가 보다며 말을 흐렸다. 나는 그의 말 끝에 '그렇게 하길 정말 잘했다'며 '우리도 자식 키우고 사는데 자식한테 부끄러운 짓 하지 말고 살자'하자 그의 얼굴이 환히 피어올랐다. 그때 만약 내가 다르게 이야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작은 부끄러움이 야금야금 양심을 검게 물들여 나중에는 그게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게 되지 않았으려나?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맞춰서 살기


엄마는 결혼 전 내게 신신당부했다. 욕심부리지 말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대로 맞춰 살아라, 그리고 절대 남 보증서는 일과 계는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엄마가 없는 살림에 쪼들려가며 애들 넷을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계를 붓고 까이고 했던 기억은 자식한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일상이었으리라. 나는 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보증설 만한 재목도 아니었고 돈도 없었다. 엄마 말마따나 '뽑은 자리에서 그대로 꼽을 줄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살림을 불리거나 이재에 밝지도 못했다. 그저 파투 안 날 정도의 살림에 만족하고 살 뿐이었다. 머리는 한 번 자르면 그대로 다듬는 일 없이 길렀고 로션도 늦가을이 들어서야 간신히 조금 바를 뿐, 화장은 일절 하지 않았으니 화장품 살 일이 없었다. 화장만 안 해도 일상은 참으로 간소하다. 옷을 사도 만 원 넘는 건 벌벌 떨며 사 입으려면 수없이 망설여야 하고 아이들 옷도 거의 지인들한테 얻어 물려 입히곤 했다. 지금도 옷 사는 일은 지극히 드물어 연중행사쯤 되려나? 그 역시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술도 직장 생활할 때 기껏해야 회식자리에서 소주 한두 잔이면 바로 잔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농사를 함께 짓게 되었을 때 나는 어린 들과 남편을 앞에 놓고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식구, 외식은 없다', 살림을 줄여야 했으니까.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들었으려나? 참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지만 그나마 우리를 지켜주었던 동아바도 아니었던 줄을 스스로 놓아버리고 나자 조금은 따뜻하고 살짝 막연했던 삶의 외곽이 확 드러나버렸다. 적어도 꼬박꼬박 들어오던, 힘이 있던 월급이 더 이상은 없어졌으므로.





엉뚱한 생각이 문득 든다. 이렇게 맞추고 유혹에 견디면서 굳이 살아왔어야 할까? 여닫이 문을 끝까지 밀듯 자기 앞의 시간을 견디며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행복이란 것들, 실크감촉으로 만져볼 수 있으려나? 어느 튼튼한 낛시대로 건져 올릴 수는 없을까?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윤슬처럼 반짝이던 순간들을 생존이란 이름으로 내박치지 않고 성큼 싱싱한 물고기를 길어 오르듯 건져내는 마법은 없으려나?



https://youtu.be/4LmEKjNTSaM?si=LJ0BsGNvgyCYYw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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