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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채집하지 못한 날들

17. 첫 임신의 기억

by 조유상

'언제 국수 먹여주나?'가 결혼 전 지겹게 듣던 레퍼토리였다면, 이젠 질문이 바뀌었다. 늙다리 청춘남녀 결혼식 후에 지인들은 뻑하면 물어왔다. 뭐, 좋은 소식 없어? 뭐가 그리 궁금들 하신 지, 분명 그냥 인사치레로 지나가며 묻는 말이었겠지만, 그 소식이 어떤 소식인지 뻔히 아는 우리로선 상당히 난처한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린 날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 덕에 슬쩍 넘어가는 위기, 휴~.


딱히 애를 낳기 위해 신혼여행 때 정 씨 시조묘에 절한 거 외엔 별다른 노력이 없던 우리였다. 둘 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과연? 못 낳을 거란 생각도 안 했지만, 낳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참으로 어중간한 나이였다. 중학교 입학식날부터 시작해 육 개월 뒤부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따박따박 나오던 생리가 문득 그치고, 미리 사두었던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그어졌다. 선명한 분홍 두 줄이 나타나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내 몸에도 기다리던 생명이 깃들였구나. 확실한 걸 알아보기 위해 그가 반차를 내고 홍성 읍내 산부인과에 가 보았다. 역시나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뭘 그리 다정히 속살거렸을까?


팔괘리에 살던 우리가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막 틀기 직전에 쾅! 소리와 함께 우리 몸은 앞으로 심하게 쏠렸다 뒤로 스프링처럼 돌아가며 나는 멍해졌다. 교통사고였다. 뒤차는 우리가 넣은 깜빡이를 채 보지 못하고 추월하려다 남편이 탄 운전석을 비스듬히 들이받으며 긁고 지나갔고, 남편 쪽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 들어왔다. 유리파편을 뒤집어쓴 우리는 잠시 공황상태. 부딪치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아직 부르지도 않은 배를 감싸 쥐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 이 아이... 어쩔꼬...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우릴 들이받은 운전사가 나와 괜찮냐고 했다. 괜찮을 리가... 남편이 신협에도 연락을 했는지 그가 일하던 신협직원이 몇 모여들었고, 경찰이 왔는지 경황이 없어 기억도 나질 않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떨구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가 그 상대 운전자한테 지금 막 임신 소식을 듣고 오는 길인데 이렇게 되었다는 말만 간신히 하니까 너무 당황하면서 병원을 가보라는 거였다. 신기하게도 우린 아무 외상이 없었다. 충격이 내상으로 남았을 뿐. 누구 차로 어떻게 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만약 잘못되었다면 하혈을 하게 될 거라고 하며 지금으로선 안정을 취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닌가. 좀 전에 갔던 산부인과에 되짚어갔지만, 아무 조처도 없었다. 어떤 희망도, 절망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의 다독거림에 기대 불안한 잠을 잘 수밖에.


다음날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온 그가 말했다. 상대 운전자가 알고 보니 같은 홍동면 (나중에 우리 동네가 될 마을에 사는) 조합장 운전기사였단다. 조합장 호출에 읍내에서 냅다 달려가다 그만 꽝 박은 거였다. 근데 그 운전기사가 젊은 사람이고 한데 우리가 합의를 해 주었으면 한단다. 합의를 안 해 주면 쇠고랑 찰 수도 있다며. 난감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에 잘못되었다면 그건 이 아이가 우리와 인연이 아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인연이라면 이런 사고에도 살아남지 않으려나? 그러고 저 젊은이는 또 뭔 죄가 있나? 실수로 재수 없게 들이받긴 했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 아닐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안 중요한 건 결코 아니지만, 이미 성인인 저 청년은 어찌해야 하나... 앞날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일단 저 청년이라도 살려놓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아이가 우리 인연이 아니라면 다음에 우리가 아이를 가지면 될 거고. 그런 마음에 결국 합의를 해 주기로 걸정하고 일체 부당한 돈은 받지 않았다. 그 뒤 한 달은, 참 느리게 흘러갔다. 하혈은 다행히 없었으니, 녀석이 우리와 만날 결심을 단단히 했던 모양이었다.


마침 거의 날 달이 다 되어 가는 즈음에 우리의 주인집이던 바로 앞집 진선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안마당까지 빌려 초상집 음식을 했고 나도 거들게 되었다. 보통 임신한 사람은 초상집에 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지만, 이미 한 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아이 아니던가. 살고 죽는 건 다 바람처럼 인생에서 숱하게 오고 가는 일일 텐데 매일 봐오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집 일을 내 몰라라 하는 건 경우가 아니다 싶었다. 그냥 함께 어우러져 도왔다. 역시 아이는 꿋꿋이 내 안에 붙어 있었다.


인연과 아닌 건 그렇게 갈리는 모양이다. 만날 사람이 결국 만나지듯이.


나는 엄마를 닮았는지 무슨 큰일이 있거나 아이를 임신했을 때마다 기가 막히게 꿈을 꾸곤 했다. 남편이 직장에서 지역민들과 일본여행을 다녀오던 3월 초 어느 날, 우리는 며칠 만에 한 몸이 되었고 그날 새벽꿈을 꾸다 번득 잠을 깼다.


내가 홍동천에서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처럼 맑고 청아한 푸른 강물을 따라 친정집까지 배영으로 자유로이 헤엄쳐 가는 꿈이었다. 아! 깨자마자 바로 태몽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맑고 밝은 기운, 물처럼 거스르지 않고 흐름을 따라 살게 될 아이, 비로소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찾아온 거였다.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은 하느님께 영광, 물을 따라 흐름에 맡기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물河) 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큰아이를 가졌을 때 우리는 홍동천을 거의 매일 저녁 산책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내 꿈과는 달리 진녹색 탁한 기운이 시퍼런 개천. 홍동 지역은 축사를 많이 하고 있어 축산폐수를 하천에 그대로 방류하고 있던 터라 오랫동안 짙푸른 죽은 샛강처럼 보였었다. 그나마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남편 퇴근이 늦으면 혼자라도 냇가를 걸었고, 천천히 걸으며 나의 피와 살을 나누어 불꽃같은 작은 생명을 피워내는 지극히 기적 같은 순간 순간을 맞이하곤 했다. '기적같이 찾아와 준 아가야, 엄마는 네가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이기보다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다른 사람과 정겹게 사랑하며 살기를 바래. 너 혼자만 살길을 찾아 이기적으로 살기보다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물 흐르듯 살면 좋겠어.' 하며 두 손을 따뜻이 비벼 배에 대고 문지르며 걷고 기도했다.


사춘기 때 한동안 울툭불툭 나랑 다투기도 했고 애를 먹이기도 했지만 결혼하고 그 녀석이 하는 행동들, 지역에서 혹은 그가 거쳐가는 일터에서 마다 들려오는 살갑고도 정겨운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 나 기도빨 좀 되나? 싶었다. 하느님은 아마 내 기도를 허투루 듣지 않으셨는가 보다.


우울증으로 힘든 자기 각시와 살아내느라 애쓰면서 우리에게 잘 키워줘서 고맙다며 감사가 깊어진다. 아들아... 이 가을, 오늘도 운전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너를 생각했단다. 엄마, 가을 타나 봐. 근데... 엄마가 더 고마워. 너가 잘 살아내는 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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