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우리말에 대해 신경써야 하는 이유.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왜 하필이면 국어국문학과에 갔는지를 설명할 것을 요구받기 마련이다. 이는 주로 명절의 친척들과의 대화에서 응답할 것을 요구받는 질문인데, 때에 따라서는 ‘앞으로 알아가야 하는 사람’이나, 참견 많은 동네 의사 등에게서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즉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이들은 자신이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부터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를 타자에게 설명할 것’을 요구받을 위기에 처한다. 이는 분명 경영학과나 수의학과에 진학할 것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잘 던져지지 않는 요구이며, 던져진다 하더라도 그 강도나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서 국문학과가 포함되는 특정 학과에 진학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은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겠지만, 정석적인 답변을 위해서라면 다음과 같은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대체 국어국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포괄적인 답변은 “우리의 말과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범주는 편의상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으로 한정하도록 하자.) 이 포괄적인 답변에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대체 우리의 말과 글을 연구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거의 무한한 종류의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대해 뉴미디어의 사용이 세대를 초월하여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 잡은 세태와 관련한 답변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이 특히나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관측되는데, 그것이 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상이란 다음과 같다. 특정 집단에서 언어가 ‘기존의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따라왔다면 자연히 통용되어야 할 의미’가 아니라, 특정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인식적 가치를 따라서 사용되며, 그 급조된 의미가 뉴미디어를 통해서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상황 말이다. 즉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할 때 기대되는 사회성이 광범위한 집단에서 지켜지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2018년 한 인터넷 방송인이 본인이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에 대한 인터넷 방송인의 응답은 모든 사람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해당 인터넷 방송인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했다. 해당 집단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쁜 존재’라는 자기네 집단만의 인식적 가치를 바탕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인터넷상에서 ‘남성혐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관측된다. 군대에서 후임이 육성으로 ‘남성혐오’라는 표현을 내뱉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여성혐오’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단어로써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단순한 혐오표현뿐만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KB 국민은행의 성차별 채용과 같은 사례와 대응하는 남성 집단의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남성혐오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집단은 남성혐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말과 글이 흔들리는 현상은 뉴미디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령 한국에서 처음 헌법이 쓰였을 때,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쓰였다. 해당 문구의 ‘인민’이 지금의 ‘국민’으로 교체당한 이유는 당시 정치권력자들이 인민을 People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라 ‘북한이 쓰기에 남한은 쓰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인식적 가치를 바탕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말과 글이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성을 잃고, 흔들리게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뉴미디어의 시대에 이러한 행태가 더욱 문제적인 이유는, 필터버블과 인지부조화 현상 등으로 인해 이러한 개념의 오용이 더욱 퍼져나가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 상태에서, 뉴미디어의 사용이 전 세대에서 일반적인 행위로 자리 잡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누군가가 ‘친일’을 ‘좌파’의 반대말로 쓰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친일’을 ‘좌파’의 반대말이라는 이유로 ‘친미’와 같이 쓰기 시작한다.
이제, 누군가는 1941년 선전포고도 없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기습하여, 1945년까지 치열하게 싸운 두 나라 중 일본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행보를 비판하는 것은, 미국 또한 비판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혹은 그 이전까지) 일본이 다른 나라에 가한 제국주의적 행보는 모두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제가 ‘사장된 문자’였던 한글을 ‘근대화’를 위해 부활시켰다는 헛소리가 포함된다.
이게 헛소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홍길동전은 무슨 문자로 쓰였는가? 양반 규수들이 필사하면서 읽던 수많은 소설들은 어떤 문자로 쓰였는가?
그리고 왜 ‘ㄱ’은 ‘ㄴ’(‘니은’)이나 ‘ㄷ’(‘디귿’)처럼 ‘기윽’이라 읽지 않고 ‘기역’이라 읽는가? 한글의 자모를 읽는 방식이 한자를 가르치는 데 언문을 이용한 ‘훈몽자회’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훈몽자회’뿐인가, ‘경세훈민정음도설’, ‘훈민정음운해’, ‘훈음종편’, ‘언문지’ 등의 조선의 훈민정음 연구서들은, 비록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는지는 잊어버렸을지언정, 한글이 창제 이후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처럼 언문은,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있는 문자였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이 부정된다. 그리고 그 주장이 뉴미디어를 타고 퍼져나간다. 마치 ‘페미니스트’가 나쁜 이들이라는 주장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교정되지 않고, 필터버블 속에 속한 집단에게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들은 당당하게 사실과 동떨어진 말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이기에, 그런 세상일수록, 그들이 당당한 태도로 내뱉고 있는 것들이 사실과 동떨어졌으며, 그렇기에 비이성적인 헛소리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성급한 단정의 자세가 아니라, 이것이 어떤 근거를 통해 하는 주장이며, 거기에 논리적 결함이 있는지 숙고하고 탐구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그런 숙고하고 탐구하는 자세를 통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연구”하는 법을 익히는 국어국문학은, 이런 세상에야말로 필요한 학문인 것이다.
앞으로도 왜 국어국문학과에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즉 왜 “우리의 말과 글을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계속해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의 말과 글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현상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사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담론들이 생산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이용하는 이들이 건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답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역할을 못할 국어국문학이라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을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