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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로 Oct 14. 2024

손창섭과 로메로

<미해결의 장>에 대한 잡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시체들의 벽> 이전에도 되살아난 시체들이 인육을 뜯어먹는 이야기를 가지고, 사회를 해부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회색빛 피부를 가진 타자화 된 시체들'에게서 가족의 해체와 인종주의 등의 사회문제를, 후속작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소비사회와 문명의 건설, 몰락까지 끌어내는 로메로의 암울한 비전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찌나 영향을 크게 미쳤는지, 필자의 고등학교 수학선생은 좀비의 어원으로 부두교를 무시하고, 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식으로 말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조지 로메로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다시 살아나는 시체들로 사회를 해부했던 것처럼, <미해결의 장>의 손창섭 또한 무능력한 인물들과 매춘부를 바탕으로 사회를 해부하려 한다. 물론 무능력한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시체만큼이나 흔하지 않은 소재는 아니며, 시야를 조금 넓게 가져 보면, 해당 작품이 무능력한 인물들로 사회를 해부하는 유일할 작품은 아닐 것이다만, 그 결과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손창섭은 많은 것들을 비판한다. 우선적으로 ‘유실몽’에서도 싹을 볼 수 있었던, '작은 집단'에 대한 비판이다. ‘진성회’라는 조직은 ‘지식인 역할’을 수행하려 하는, 적어도 자신들이, 혹은 계화기 시대의 사람들이 ‘지식인’이라는 조직에 기대하는 역할을 하려는 조직이다.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도덕적 실현에 몰두하는 삶 말이다. 헌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능력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실제로 이들이 남들을 돕는 행위를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끼리끼리 모여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자는’ 아저씨들이 할만한 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 했던 이들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작은 조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즉 이들이 세상을 변하기 위해 조직한 '집단'은,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며 구성원들의 동력을 잡아먹기만 하는 '집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위 ‘정상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진성회 회원인 문 선생이 자신의 딸이 몸을 판다는 이유로 자신의 죄악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라. 문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신념에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고해성사이지만, 밖에서 보면 그 조직이라는 것은 아저씨들끼리 서로를 격려하는 의미 없는 조직이며, 광순이가 역병처럼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 또한 아니다. 사람을 매춘업이라는 노동자 처우가 지독하게 불리한 직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악의 축으로 몰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문 선생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의 인정을 갈구할 뿐이지, 자신이 객관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생각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는 조직에 잡아먹히며,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얼마나 빈약하고 형편없는지 판단할 능력도 잃어버렸고, 이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능력 또한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문 선생의 처지를 마냥 비웃을 수도 없는 것이, 그런 조직에서 벗어나 있는 화자 역시도 미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생각 없는 푸념에서 자신이 처한 문제의 해답을 찾는데, 인간을 병균으로 규정하는 데까지는 그나마 젊은이가 할만한 인간혐오라 볼 수 있고, 아버지에게 내쫓기는 것을 광순이의 집에서 자며 해결하려는 것은 그저 손창섭 소설의 무기력한 주인공의 특징으로 보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광순이에게서 받은 돈을 가지고, 만둣국을 먹어야 하는데, 일본요리를 시켰다며 혼란에 빠져 헛소리를 하는데서 전조가 보이더니, 선옥에게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며 매춘업을 소개시켜 주며 "매춘업의 조건"과 "선옥이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이유" 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작중 화자 또한 가난 속에서 미국유학을 찾거나, 의미 없는 조직에 몸을 바치고 정신까지 바치는 사람들과 비슷할 정도로 미친상태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고 보면, 이 작품에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작동하는 인물은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야 가정형편을 개선할 대책 없이 미국유학을 부르짖고 있고, 어머니는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하지 못한 체 분위기에 휩슬려간다. 지숙은, <혈서>의 창애에 버금하는 ‘괴팍한 여성’쯤으로 묘사되는데, 역시나 꿈에 취해 살아가는 인지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나마 인지능력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라고는, 자신을 팔아넘기겠다는 협박을 피해 "대학에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는 꿈을 찾아왔다가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선옥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묘사되지 않는 광순이 뿐이다.


 특히 광순이와 선옥의 입지는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중요하다. 광순이와 유사한 인물을 굳이 찾아보자면, 유실몽에서 주인공의 누이쯤이나 해당될 텐데, 그러한 누이에서 묘사되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조리 사라진 결과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손창섭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특정 인물상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선옥은, 손창섭 소설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꿈'과 '좌절' 모두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작중 화자 또한 '현실을 아는 멀쩡한 인물'이 아님을 알려주는 방향으로 쓰이는 것이 초기 손창섭 소설의 염세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다시 한번 화자가 선옥에게 매춘을 추천하는 장면을 보라. 우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자를 포함해서 '미친 사람들'이거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판단조차 불가한 철저한 타자'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선옥 또한 구원을 찾아온 곳에서 마주한 것이 시궁창 같은 현실이라는 점에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들은 모두 미쳐있는가? 작중에서야 절대적인 가난 때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만, 자신이 처한 처지를 개선하려는 욕구가 좌절되는 것과, 비정상적인 문화의 강요가 어디 그런 환경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이겠는가. 그런 생각에 이르니, 필자는 시체들이 사람을 뜯어먹는 것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이고, 읽으며 생각없이 등록금을 낭비하고 있는 나 또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의 ‘광순이, 광순이’를 중얼거리는 장면에서는, <암흑의 핵심>의 ‘공포, 공포’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장면까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암흑의 핵심이야, 백인이 모르는 문화를 보고 멋대로 판단하며 멋대로 미쳐가는 소설이라 조소라도 하면 된다만, 이 소설에서 받는 그 느낌은 대체 무시할 방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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