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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로 Oct 14. 2024

예술가가 그러다간 죽기 마련이다

최인호, <모범동화> - 평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잡담

 학교 앞에서 아이들의 환상을 이용해 잡화상 일을 하던 강씨는, 신학년 초, 6학년 1반에 전학 온 ‘속임수를 고발하는’ 아이와 대결을 벌이다 죽는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요약해도 될까 싶긴 한데, 논의에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추가로 언급하기로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 보기로 하자. 필자에게는 이 이야기가 평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대결의 은유로 읽힌다.


 강씨는 아이들이 모범적인 어른이라는 생물에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파악한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모범적인 어른’을 연기한다. 예술가라는 존재가, 적어도 ‘상업영화’ 제작자라는 존재는 ‘대중’의 환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예술품을 제공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자. (솔직히 그 대상이 ‘상업영화’가 아니라 ‘문단소설’이어도 상관은 없다. 수많은 ‘문학청년’들이 ‘심사위원의 취향을 찾아가며’ 시인이나 소설가로 등단을 준비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결국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시나 소설에 대한 환상을 파악하고, 그 환상에 맞는 소위 ‘문학작품’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게다가, 강씨가 그 아이와 대결을 준비하며 ‘심지’를 가지고 묘기를 준비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그것은 일테면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최초로 가진 그의 예술이었다(...) 그의 정신세계의 일부가 그 심지 위에서 녹을 벗기고 번쩍이기 시작하는 것인 양 그는 일종의 무아지경 속에서 손끝을 놀렸다.” 이는 대놓고 무아지경에 빠진 예술가의 모습이 아닌가.


 반면에 ‘아이’가 어떻게 소개되는지를 보자. 그는 흔히 그 나이 또래에서 괴롭힘의 대상이 될 만한 요소들, 즉 빈번하게 지각을 한다던가 얼굴의 주름살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괴롭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는 그 아이가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아이들과 동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가 유명해지는 사건을 살펴보자. 그는 서커스에서 마술의 속임수를 다른 아이들에게 폭로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지적 우월감’을 주며 유명해진다. 아이는 마술의 비법을 아는 사람, 사람을 속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비법을 나누는 사람이다. 그리고 평론가들 또한 작품의 기법을 밝히고, 즉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독자를 속이려 했는지를 밝히고, 이를 평론을 통해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평론가들 또한, 그런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과 구분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인호 씨는 평론가에 대해서 좋은 인식은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마술이란 무엇인가. 관객도 속임수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느 정도는 속아 주며’ 즐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이’가 속임수를 폭로하면서, 서커스의 분위기는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는? 마술사는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은 조롱당한다. 이게 좋은 모습일 리가 있나.


 ‘아이’가 학교 성적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지만, ‘바주카포의 화력’ 같은 학교 성적과 관련 없는 정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거나, 선생님의 말을 전부 공갈로 취급할 정도로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도 ‘평론가에 대한 (최인호 작가의) 좋지 않은 인식’으로 해석 가능하다. 평론가는 주식 시세나, 돈을 버는 법, 남에게 아첨하는 법, 미국인과 계약을 따내는 법 같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리스 사람들이 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칸트가 천제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프랑스 문학의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 같은 ‘쓸모없는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스푼이 허공을 좀 날기로서니 그게 뭐 어쨌다는 말씀이야. 그런 것은 불란서 자식들이 다 써먹었어.” 같은 말을 하고, ‘대중소설 작가’ 같은 딱지를 붙이며, 독자들이 갖는 작품의 환상을 깨트린다. 그 결과 ‘나 작품 좀 읽었소.’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작품에 대한 순수한 환상은 깨지며, 작품은 감상이 아닌 누가 더 잘 욕하는가 의 대상이 된다. (「무서운 복수」에서 작품에 대해 논하던 이들도 정치외교과 학생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강씨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판을 받고, 평론가와 대결하려 하는 예술가인 샘이다. 그리고 그 대결은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는 이미 강씨가 사용하는 속임수 - 원판, 주사위, 심지묘기 -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술에 쓰이는 트릭을 모두 파악하는 아이가 그 정도 속임수를 파악하지 못하겠는가? 수많은 작품을 읽어온 평론가가, 작품의 기법을 파악해서 어떻게 해석할지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강씨같은 열악한 처지에 있는 예술가가 쓸법한 제주를 모르고 있겠는가? 평론가에게 강씨가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마술’이 아니라, 너무나도 흔해빠진 속임수를 가지고 처절하게 시도하는 기예의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평론가는 속임수를 밝히고, 예술가는 죽는다. 


 이 해석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이 1970년에 쓰였다는 점, 즉 최인호 작가가 평론가들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전에 쓰였다는 점이다. 최인호 작가가 『별들의 고향』 발표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인 후, 나왔다면 위의 평론가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이 자연히 해석이 되지만, 아직까지는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니까. 하지만, 평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관계는 그전에도 꾸준히 예술 작품의 소재였으니, 최인호 씨가 이 작품을 쓰며 ‘평론가 캐리커쳐’를 썼다고 해서 이상할 일이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사탕 열 개로 사람을 낚으려 하는 강씨의 태도가 예술가라기보다는 자본주의에 찌든 장사꾼, 자본주의에 찌든 어른에 가깝다는 점을 들고, 이에 속는 아이들의 태도는 자본주의의 허황된 거짓말에 속는 ‘개미주주’들에 가깝다는 말을 하며, 강씨의 이야기는 ‘예술가와 평론가’의 이야기가 아닌, ‘위선과 그 까발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필자의 답은, 그 위선을 조장하는 자들은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났다는 이유로 자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강씨처럼 술을 마시며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씨의 속임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본과 결탁한 예술가가 됐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작품을 팔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예술가 말이다) 강씨라는 사람은 ‘그런 종류의 위선(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위선)’과 예술가 모두를 상징하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인호라는 사람은, ‘예술가와 평론가의 관계’라는 소제가 진부한 소재라는 것을 알고, 양념처럼 몇 가지 소재를 섞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여간 이 작품에서 이런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듯하다. 당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알라. 당신이 쓰는 소재가 무슨 맥락에서 사용된 적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어떻게 보완할지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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