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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로 Oct 18. 2024

지성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이기영, <서화>에 대한 잡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즉 문학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회주의적) 삶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이념을 표방하며 활동했던 카프의 작가 이기영은 1933년 <서화>를 발표한다.


 여유가 사라져 가며, 전통놀이는 아이들만이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되고,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노름뿐인 농촌. 소작농의 아들 돌쇠는 도박판에서 큰돈을 딴다. 이는 마을 소작농들의 노동 의지를 쇠퇴시키고, 사람들이 노름판으로 몰리게 만든다. 한편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응삼이'의 아내이면서, 돌쇠와 연인관계를 유지해 오던 이뿐이에게 면서기 김원준이 접근한다. 이뿐이는 김원준의 접근을 거부하고, 이에 모욕감을 느낀 원준은 노름 근절을 표방하는 마을회의를 통해 망신을 주려 한다. 하지만 지식인 정광조의 개입으로, 마을회의는 돌쇠가 원준의 부정을 고발하며 끝나게 되며, 그 뒤 돌쇠와 이뿐이는 서로 만나 감상을 나눈다. 


 거의 100년 전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우리 삶의 모습이 100년 전과 하나도 겹치는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나름대로의 비극이겠지만, 100년 전에도 비판하고, 해결하려 해 왔던 일들이, 아직도 근절되기는커녕 당당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남아 있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시스템의 병폐로 인해, 노동의지를 잃어버린 소작농들을 보자. 이들에게는 성공이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운에 달린 대상이다. 그리고 그런 운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공은커녕 당장 입에 풀칠할 곡식이 없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100년가량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성공은 순전히 운에 달린 대상이다. 좋은 직업은 유산으로 계승되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원래 자리에 머무른 채 제자리를 맴돌 상황일 뿐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는 사람의 수는 줄었다만, 여전히 어떤 직종의 종사자들은 생존권조차 보호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 당장 2024년 10월 9일에도, 한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김용균 씨의 죽음 이후, 비정규직은 싼값에 팔리면서도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의 대명사가 됐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중대재해법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예외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중간착취방지법은 아직도 국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소진해야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어떤 이들은 자기개발에 투자하고 스펙을 쌓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사회이다. 거의 신분제라는 것이 다시 부활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절망한 채, 비트코인이나 주식 같은 도박판에만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옆나라 일본을 보라.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 나라의 청년들은 이 작품의 소작농들처럼 노동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이들에게 달관세대라는 이름을 붙이며 이들을 본받아 한국의 청년들 또한 적당히 포기하고 사는 삶을 살 것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리고 여성인권문제는 어떤가? 물론 이제 정략결혼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우리 사회에서 불륜을 벌인다면, 이쁜이나 돌쇠의 경우처럼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벌어진 일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정으로 인해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 들어 본 적 없던 사람들 사이에서, 일부 남성들에게 그 단어는 욕설이 됐다.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주장들은 조롱거리로 삼는 것이 유행이며, <82년생 김지영>을 읽어보지도 않고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넘쳐난다. 이게 담뱃대로 자기 부인을 구타하던 남성의 모습과 뭐가 다른가. 이뿐이를 강간하려 했던 원준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심지어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수를 꾀하는 원준의 모습은 지금 소위 증명불가능하며 주장만으로 존재하는 '혐오를 위해 존재하는 손가락 모양'에 집착하며 기업을 공격하는 인터넷상의 일부 남성들과 빼어 닮았다.)


 이렇게 100년도 넘게 묵은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꾸준히 사회적인 악영향을 일으키며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결국 '지성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조금이나마 정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 작품의 결말은, 너무나도 순진해 보일 뿐만 아니라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라는 것이 이 나라에 이식된 지 적어도 100년이 지났음에도, 그동안 교육이라는 게 이런 현상들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시해 왔음에도, 우리가 아직 10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더 똑똑해져야 하고, 얼마나 더 소리쳐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앞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소리쳐야 하고, 이러한 사회의 병폐들을 고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백래시의 시대에, 나중에의 시대에, '지성에 대한 믿음'을 담보한 결말을 망설임 없이 쓸 수 있었던 이기영이 어쩔 수 없이 부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현실 사회주의'가 자신이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몰락하고, 이것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자신에게 지적한 문제가 없어짐을 증명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한 이 사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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