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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로 Oct 29. 2024

우리가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는 착각

하길종,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잡담

 그런 때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다른 이들은 나름대로 전진이라는 걸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정체된 것을 넘어 퇴보하고 있는, 그런데 사회마저도 전반적으로는 퇴보하고 있어 보이는, 그런 시기 말이다. 물론 이것이 정말로 그런 것인지, 개인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괴상한 표어가 통용되던 유신체제 아래에서의 한국 사회가 퇴보하고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남들이 취업이니 스펙이니 학점이니 쌓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자신이 퇴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또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분명하다. 


 <바보들의 행진>은 그런 때의 그런 느낌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병태와 영철이 영자와 순자가 연애를 하는 내용이라 거칠게 요약될 수 있는데, 여기서 병태가 영자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지점을 살펴보자. 영자는 시험을 망치고 낙제를 면하기 위해 레포트를 받아 갈 정도로 연극준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적어도 영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힘을 쏟은 연극에서 정작 영자의 분량은 결말의 대사 몇 줄이 전부이다. 심지어 그는 결말 뒤의 인사에서 꽃다발과 환호를 받는 자리에서 서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학업까지 버리고 인생을 투자한 활동이 있는데, 정작 그 활동에서도 뭔가를 하지는 못한 것이다. 당연히 ‘내가 뭘 하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다른 배우들이 환호받는 와중에 영자 홀로 분장실에서 처량하게 눈물짓고 있는 것도 그런 심리의 결과였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여기서 영자의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하는 심리가 드러나는 장면이, 즉 분장실에서 홀로 처량하게 눈물짓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병태와 영철과 영자와 순자와의 술자리 장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철은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적어도 병태와 영철이 계속해서 직면하게 되기는 하는 명제를 던진다. “나는 지금까지 이룬 것이 없다.”, “철학과를 나와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생계를 유지한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명제들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철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봤고, (그 일련의 실패담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공장을 차려 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생계가 해결된 뒤에는 고래를 잡겠다는 목표를 잡는다. 이게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영철이 이 답변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답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계속해서 병태와 영철을 따라다닌다. 우선 위 술자리에서 이어진 병태와 영자와의 관계를 보자. 이 둘의 관계에서 영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대체 철학과를 나와서 어떻게 먹고살겠다는 것인가?’ 대학 축구대회 후, 낙엽 위에서 처음 던져진 이 질문은 계속해서 ‘혼기를 놓치면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나(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이 살자는 게 네 욕망이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등으로 변주되며 결국 병태가 영자와 일차적으로 헤어지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영화는 이를 확실해 보여주기 위해, 이들이 헤어지기 직전에 이들의 대화를 그대로 반복해주기까지 한다. 


 영철과 순자와의 관계에서도 이 질문은 반복된다. 우선 이들이 갖는 첫 번째 데이트에서, 영철은 저번에 던졌던 답변(돈을 벌고, 고래를 잡으러 갈 것이다)을 다시 반복한다. 순자는 이를 지겨워하고, 이는 결국 영철과 순자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영화는 죽음을 맞이하는 영철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반복되는 질문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영철과 순자와의 관계에서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영철이 자신의 답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술자리마다 그 답변을 반복하고 있겠는가? 그러한 반복은, 영철이 반복을 통한 자기 세뇌를 시도하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영철이 순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점이고, 영철이 순자를 우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순결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운운하는 대사에서 확인 가능한다.) 이를 연결시켜 보자. 영철과 순자와의 관계에서, 영철은 여전히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이 실현할 수 있을만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존재가 등장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시도가 먹히지 않자, 동해바다로 가서 자살한다. 


 여기서 요점은 우상화나 타자화가 아니라, 영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앞으로도 ‘무엇을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는 점에 있다. 즉, 영철은 자신의 중고등학교 경험상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순자와의 관계에 비추어 봤을 때, 앞으로도 뭔가를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느낀 절망감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의 시대에 느꼈을 절망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영철이 죽기 전의 모습을 보자. 권위주의를 앞세우는 교수에게 폭행당한 뒤, 그는 거리를 질주한다. 여기에는 ‘한국적 스트리킹’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한국에서 독재가 민주주의라면, 한국에서 옷을 입고 뛰는 것 또한 스트리킹이므로. 그리고 영철이 죽은 뒤, 대학은 유신에 의해 휴교령이 내려지게 된다. 영철의 죽음의 전후로 유신과 관련된 모습이 삽입되며, 영철의 절망감에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황 또한 개입되어 있음이 암시되는 것이다. 


 분명 <바보들의 행진>은 굉장히 70년대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텍스트이다. 이는 영화가 매끄러운 걸작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지점들과 기술적, 문화적 한계들이 뒤섞여있는 혼종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가령  영화가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현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한계가 자명하며, '순결을 바칠 것'을 맹하는 영철의 행동거지 또한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화면은 어떤가. 70년대의 칙칙한 컬러 화면은 동시대의 <대부 2>와 같은 미국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오발탄>의 흑백 화면보다도 못생겼다. 그러나 그 묘하게 칙칙한 화면이 오히려 당시 서울의 분위기를 솔직히 전달해 주는 것도 같으니, 그 당시의 서울이 세련되고 멋있는 도시였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소리의 활용은 어떤가. 영화의 음향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보관 과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편은 아니며 종종 대사를 해석하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휴교령이 내려지는 운동장에서 안내방송의 “들립니까?”가 점점 커지다 절규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되는 장면처럼 야심적이며 인상적인 시도가 존재한다. 원작자 최인호 씨를 심판으로 등장시킨 술 시합 장면 중에서, 갑자기 맥락과 관계없이 삽입되는 “시위대의 사진을 확대해 보는 장면”은 유신정권의 검열이 강제로 탄생시킨 '모더니즘적인 것'의 극치이며, 영화 곳곳에 나타나는 -소설 <바보들의 행진>보다 1년 앞서 발표된- 최인호의 소설 <무서운 복수>(1972)의 인용들은, 소설이 다루던 1964년 6.3 항쟁의 맥락을 영화 속 장면과 연결시키기까지 한다.


 이에 더해 영화는 곳곳에서 당시의 물신주의적 면모 (가령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영철의 답변이 "공장을 차려 돈을 벌겠다"라는 점 등을 찾을 수 있겠다)를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것이 얼마나 최인호의 개성이 녹아난 것인지, 하길종의 개성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최인호는 분명 인간소외의 문제를 집중해서 다루는 작가였고, 70년대는 60년대에 시작된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근대화'로 인한 소외가 극단에 다다르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주체는 '시장'이 아니라 시장과 결합한 군부독재였고, 파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조지 루카스의 친구인 하길종이 보기에 그것이 기괴해 보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기괴한 상황 속에서 영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시장도 아니고 군부도 아닌, 이들이 결합한 기이한 체제가,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어 이촌향도를 유도하고, 노동자를 쥐어짜고 있다. 그렇게 나온 모든 부는 다시 체제의, 박정희의 비자금으로 들어가며 독재를 강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목숨을 갈아 넣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주체가 '자본'도 아닌 박정희인 상황에서, 정작 그 자신은 정경유착이라는 비효율의 주체인 상황 속에서, 그가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 독재의 기반을 마련해 버린 상황 속에서,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의 결말에서, 영철은 죽고, 병태와 영자만이 남았다. 당연히 해결되지 못한 질문 또한 남아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도 여기에는 명쾌한 답변 같은 것은 던져지지 않는다. 다만 불가능해 보이고, 이 체재 안에서는 비이성적이며, 그렇기에 체제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이 행해진다. 이들은 헤어지기로 했던 결정을 뒤집고 사랑이라는 것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결말의 키스신은, 당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 내지는 해답으로 남게 된다. 


 분명 <바보들의 행진>은 시대를 초월한 작품은 아니지만, 1970년대 한국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오히려 그 때문에 탐구되고 감상되어야 할 텍스트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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