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았어요.
아빠는 파란 용달차를 끌었다. 일이 많은 날은 저녁 12시가 넘어서도 집에 못 들어오다가 일이 없는 날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에만 있었다. 엄마는 근처 공장 청소를 했다. 삼성인가 어딘가에 컴퓨터 부품을 납품한다는 공장이었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 집채만 한 기계에 깔렸다. 다리에 철심을 10 몇 갠가 박았다고 했는데도 남들이 말하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나는 지방대를 자퇴한 딸내미였다. 결혼을 하내마내 하다 파혼까지 당한 딸내미.
내가 살던 시골집은 늘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 코끝이 시렸던 시골집 한켠엔 곰팡이가 가득 피어있었다. 집 밖에선 한마디도 못하고 눈치만 보다 집에 오면, 그 망할 놈의 집구석에만 오면 우리는 서로에게 욕을 해댔다. 나가 뒤져버리라는 저주까지 얹어서.
가난이라는 게. 부모님이 청소일을 하고 용달일을 한다는 게 알만한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게 그랬다. 흉이었고 단점이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족새였으니까.
그런 기억들이 고드름처럼 얼다 녹는다. 기분 나쁜 것들이 똑똑 녹아 흘러내린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기로 했다. 굽이굽이 이어진 그 사연들을, 한 많은 인생을 나는 삽을 들어 모래로 덮어버렸다.
늘 자신이 없었다. 덩치는 산만한데 가난이 길어진 탓에 마음까지 가난해져 버렸다.
지우고 싶던 것들. 나의 과거. 옛날이야기.
모든 것은 거기에서 시작이었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천박했고 더러웠다. 삶이. 숨이 붙어있다는 게.
벌써 20년도 다 된 이야기들이 느닷없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꽂힌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다 덮고 사는 줄 알았는데 무릎이 쿵. 고꾸라진다. 제대로 설 힘도 없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간다. 이야기 때문에 이야기 덕분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삶에 진심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누구보다 고생하며 살았던 이야기들.
나는 이야기가 사람들을 보듬어 준다고 믿는다. 이야기가. 한이 서려있는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보낸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편해졌다. 그건 동정을 바라는 것도 이해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다. 내 이야기를 먼저 하면 마음이 다친 상대방도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으니까. 그럼 이야기가 이야기를 위로해 주고 용기를 보내니까.
이야기가 많은 당신에게 오늘도 내 이야기를 보낸다.
:)
12월 11일. 내 생일 하루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