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3. 여행의 이유 1
지난주 인도네시아 롬복 여행을 다녀왔다. 인도네시아는 발리 두 번, 자카르타-족자카르타에 이어 롬복. 네 번째 방문이다. 발리로 입국해 바로 길리 트라왕안, 길리 아이르를 거쳐 롬복에서 아웃했다. 린자니 화산 트레킹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토바이로 롬복을 돌았다.
나는 꽤 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고, 좋으면 두 번 세 번 네 번도 간다. 그런데 이번 여행 후 문득 '왜 나는 여행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을 꿈꾸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은 탈주하고 싶고 낯선 곳에선 안주하고 싶다. 물론 여행은 여행일 뿐이고 일상은 일상일 뿐이지만……
그래서 미련을 못 버리나? 나는 왜 여행하는가?
나의 첫 해외여행은 2006년 방콕-파타야 패키지여행이었다. 언니(언니 이야기는 언젠가…) 나, 세 살 아들 이렇게 우리 셋이 떠났었다. 당시 우리나라 1위 여행사 ㅇㅇ투어의 상품 중 가장 비싼 일명 <품격> 상품이었기에 우리 셋의 단독 투어로 진행되었다. 서울에 살던 언니 덕에 언니 집에 가서 여행 준비를 마쳤고 난생처음 인천 공항 국제선 터미널에서 출발했었다. 고작 4박 6일짜리 여행에 큰 캐리어가 인당 한 개씩이었고 옷과 신발, 모자, 액세서리까지 풀셋으로 준비하고 비상약에 아이 먹거리까지 그야말로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백화점보다 지하상가가 더 편했던 나는 면세점 명품샵 입장이 부담스러웠는데(지금도 불편하다. 직원들이 무심하거나 하면 내게서 선천적 빈티라도 나는지 점검하게 된다. 이런 몹쓸......). 수입이 없던 내가 면세점 쇼핑을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가끔 언니가 명품 구두나 화장품 등을 샀는데 같이 매장에 들어가 구경하는 것만으로 신분 상승(?)의 기분을 느꼈다.
출국 심사, 입국 심사도 두려웠지만 신기했고 한국의 추운 겨울에서 따뜻한 동남아 태국 땅에 도착하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행사의 상징인 넥타이를 매고 우리를 기다렸던 한국인 가이드와 만나 고급 벤에 짐을 싣고 바로 파타야로 갔던 것 같다. 차 창밖으로 보이는 온통 이국적인 풍경에 설렘과 환희가 교차했다. 해외여행이라니...... 촌놈이 출세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한데 유명한 관광지들을 도는 일정이었다. 파타야의 악어농장과 사원 등을 갔었던 것 같다. 방콕에 가서는 에메랄드 사원, 왕궁, 야시장, 마술쇼 등등을 갔었는데 짜인 스케줄이었지만 코스에 대해 평할 것도 없이 그저 재밌고 신기했다.
가져간 옷과 신발들을 날짜별로 코디해 의기양양하게 누볐다.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불안한 청춘의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내가 설정한 나의 자아가 탄생했다. 스물넷에 결혼한, 스물다섯에 엄마가 된 무직의 20대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0그램이 되었다. 밤이면 언니와 맥주를 마시면서 가여운 내 청춘을 달랬다. 당시의 나는 엄마라는 타이틀을 견딜 수 없었다. 엄마가 되기 싫었던 게 아니다. 엄마가 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지금(2006년)의 나보다 더 어렸을 내 엄마를 해석했고, 내가 살아내야 할 엄마를 규정하느라 내 인생의 증인이자 동지이자 후원자인 언니와 밤을 새웠다. 그 시절 무엇보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강요돤(?) '가족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20대 무직 여성의 잔혹사들로 온통 슬픈 밤들은 다시 태국의 낮 태양으로 달래졌다.
여행지를 다니는 동안은 낯선 시공간에서 충분히 각성되는 동물적인 감각, 작은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 하나하나 집중하게 되는 순간들이 좋았다. 그 외의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한국, 시댁, 미래....)...... 무엇보다 으리으리한 5성급 호텔의 규모와 수준, 특히 호텔 조식과 수영장이 너무 좋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부자들의 휴가 모양새가 갖춰졌다. 일찍 사회생활을 한 언니 덕에, 호텔 경영을 전공한 울 언니 덕에 호텔이나 레스토랑 매너를 공부(?)하면서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은 심정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 처음 경험한 마사지도 천국이었다. 호텔 수영장과 조식, 마사지는 향후 동남아 전역을 여행하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푸껫, 발리, 괌을 내가 직장이 없던 시절, 언니의 도움으로 다녀왔다. 나는 결혼 예물로 받은 금반지를 팔기도 했고, 아이 돌반지를 팔기도 하면서 여행을 갔다. 그때는 여행이라기보다 내 삶이 비루해 견딜 수 없을 때 새로운 자아를 출동시키는 병적인 자위였다. 예쁜 옷, 호텔, 마사지, 그리고 현지 맥주……나는 그 시절 나의 여행을 일종의 진통제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씨엠립의 밤, 푸껫의 밤, 괌의 밤에도 나의 청춘은 슬펐고 또 낮에는 달래졌다. 매번 나의 언니는 먼저 결혼해 아이를 낳은 여동생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피느라 돈과 마음을 썼다.
직장을 갖고 나의 여행이 본격화된다. 나는 이제 안정된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일정한 수입이 있고 휴가를 다녀올 수 있고 내 삶을 주도할 수 있게 된 만큼 여행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자유여행으로, 시간과 돈이 준비되는 대로 다녔다. 한이 맺힌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다닌 것 같다. 왜였을까?
나는 직장에서도 탈주하고 싶었고 가사와 육아에서도 탈주하고 싶었다. 지구인으로 태어난 것부터가 문제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의 별을 그토록 찾아 헤매는 건지. 아무튼 나는 1년에 두세 번씩 해외여행을 가고 그곳에서 나의 돈과 고통을 탕진했다. 회를 거듭해 가며 나의 캐리어가 배낭으로, 나의 여행지들이 유럽과 오지로 확대(?)되었고 그러면서 관광객에서 여행자로의 변모를 꾀한다. 첫 배낭여행은 미얀마였고, 이후 2달 동안의 동남아여행을 갔다. 결정적인 변곡점은 2018년 1월 인도 여행이었다. 중3아들과 유치원생 딸을 데리고 떠난 한 달의 여행, 인도-스리랑카-몰디브... 그 여행을 계기로 나는 완전한 로컬리제이션(localization)을 표방한 여행을 추구한다. 유럽 한 달 배낭여행에 이어 어디든 그레고리 75리터 배낭과 함께였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한비야 비슷하게 느꼈던 것도 같다. 물론 흉내만 낸 거지만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여행지를 선정하고 계획하고 실행한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더 많고 틈만 나면 세계 지도를 뒤적인다.
그것이 내가 하노이에 거주하게 된 원인일지 모른다. 근원적인 역마살. 입버릇처럼 나는 자유주의자(정치적 사회적 규정 말고)라고, 내가 가진 자유가 한 줌 밖에 안될지라도 나는 자유롭고 싶다고 했다. 그 자유가 확인되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었다. 일상은 엄마와 공무원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바친 제물들(일탈, 무질서, 낭만?)의 결과 규칙과 의무와 책임으로 굴러갔다. 내 삶은 자유의 획득 과정이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여행했고 하고 있다.
나를 내적, 외적으로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한다. 그리고 매번 실패한다. 시지프스처럼 도전과 실패를 반복한다. 내 여행은 그랬다. 그런 내가 의문을 품는다. 이 짓을 계속해야 할까? 돌아보면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오르는 연봉에 따라 갈 수 있는 거리와 기간이 길어질 뿐, 정리하지도 못한 무수한 사진들로만 박제된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내 삶은 좀 나아졌을까?
.......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을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맞는 말이다. 나의 시작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슬픔과 상처, 그 압박으로부터의 도피 아니 탈출이었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하노이에 살면서 점점 뚜렷해지는 감각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자리로, 내 나라로, 내 도시로, 내 집으로...... 그때는 답을 할 수 있으려나.....
회사원인 남편이 긴 여행을 할 수 없다 보니 주로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과는 비행 거리가 짧은 홍콩, 일본, 사이판 정도를 다녀왔고 지금 남편은 하노이에 자주 오고 있다. 그런 남편이 미친 듯이 여행에 집착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다.
지금도 공항을 갈 때면 그 많은 사람들이 각자 어떤 꿈과 계획들을 품고 떠나는지 신기하다. 딸아이가 이번 여행을 마치고 내게 말했다. " 엄마, 이제 여행을 좀 쉬면 안 돼? "
쉬면 안 되나? 나에게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쉬자. 다음 여행 전까지...(이런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