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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억만개의 치욕 Oct 14. 2024

신짜오 비엣남-오토바이 구입 사건

#6. 도박을 하다

하노이 라이프 100일 차에 남편이 다녀 가고 나는 심난한 시간을 보냈다. 생활의 불편, 직장 문화의 부적응, 독박 육아……총체적 난국이었다.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물어오는 동료들에게 ‘코로나로 여행 발이 묶여 역마살이 발동했다’ 라거나 ‘직장 생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 돌파구가 필요했다’라는 식의 답을 했으나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마흔 넘도록 내가 나를 모르겠고, 인생은 더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도 아닌 나로, 그냥 나로,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처음부터 알아내보고 싶었다.


나의 지향, 나의 욕망, 나의 언어, 나의 규범은 사실 진짜가 아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이 선택은 마침내 나를, 내 삶을 분열시키고 계절성 독감처럼 내 영혼을 주기적으로 진통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시달렸다. 지금도 시달린다. ‘나는 누구인가?‘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딸로서, 그리고 실패했지만 며느리로서. 그러고 보면 나는  ‘아내’의 정체성이 오랫동안 없었다. 나는 여자친구였고 후배였다.(나는 캠퍼스 커플이다) 사실 아내라는 성숙한 이름은 아직 내 것이 아닌 것 같다.(하지만 내가 아내로 살기로 한 슬픈 사연은 다음에) 뭐가 되었든 사실은 모두 짐스러웠다.


스물넷에 결혼해 20년 차 주부로 살면서 내가 감당해야

했던 모든 것들은 정말이지 나의 영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운명의 강요 같은 거였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안 어울려서 못할까 봐. 특히 아이들 케어는 더 강박적으로 했다. 밤늦게 퇴근해도 새 밥에 국까지 다음날 아침 준비를 했고 아들은 중, 고 6년 동안 매일 교복, 체육복을 다려 입혔다. 딸아이는 매일 아침 다른 스타일로 머리카락을 땋고 묶었다.(지금도 딸아이 교복, 체육복을 매일 다림질하고 아침마다 머리카락은 내가 묶는다. 공평하게) 내게 신비한 초능력이 장전된 건지 이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나는 이겼다.


한편 인간관계의 피로가 극심했다. ‘좋은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길 원했다. 관계는 의무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기울어지고 결국 상처를 남기고 끝난다.(끝내지조차 못하는 관계가 더 힘들다) 마음의 긴장을 놓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아무도 모른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다들 보이는 것만 믿으니까 비주얼로, 이미지로만 다들 나를 ‘센 언니’란다. 할 말 다 하고 살아서 좋겠단다. ‘우와…… 진짜 할 말 다 해도 되나?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는 속으로만.


암튼 내가 하노이로 오게 된 동기는 내 삶의 속박을, 일상적, 정신적, 관계적 속박을 끊어내고 새로워지기. 좀 다르게 살아보기였던 것 같다. 내 삶의 얼룩들이 좀 지워지고 희미해졌으면 했다.


그러나 하노이에서의 100일은 새로워지기는커녕 나의

불안과 자책을 가중시켰다. 아무도 모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의 삶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없었으므로 일상은 더 어려워지고 정신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힘들었다.


나는 도박을 결심한다.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그건 바로 ’ 내가 살면서 절대 못할, 안 할 일을 하는 것‘. 그 첫 번째 도전이 바로 오토바이다.


그즈음 남자 동료들 뿐 아니라 젊은 여자 동료들이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안장 위에서의 불균형을 견딜 수 없었고 내 몸이 오픈된 채 속도를 내며 도로 위를 달릴 자신이 없었다. 내 몸 근거리를 스쳐가는 자동차들이 공포스럽다. 심지어 자동차 운전도 즐기지 않는다. 내 차에 가까이 붙는 차들을 불신한다. 그런 내가 무질서의 끝판왕 하노이에서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 이건 분명 도박이다.


나는 결심한다. 내가 하노이에서 오토바이 타기에 성공하면 나는 여기 더 머물고 실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우선 통근 버스에서 베트남 사람들의 오토바이 운전 방법과 교통 문화(예를 들면 신호 바뀌기 3-4초 전에 미리 출발하거나 역주행, 인도로 달리기 등)를 공부했다. 다음은 실습. 동료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가르쳐달라 부탁하고 직장 뒤뜰에서 시동 걸고 10미터를 가본 게 처음. 두 번째 실습은 우리 아파트 뒷길이었는데 30미터나 갔을까 나는 넘어져버리고 만다. 동료의 오토바이에 작은 스크래치가 났다. 아……남의 오토바이로는 연습을 하면 안 되겠다 싶다. 미안한 마음 우짤꼬.


그래서! 나는 오토바이를 사러 간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아직도 직장에서는 나의 오토바이 구입 사건이 회자된다. 똘끼 인증. 나는 딸아이와 오토바이 중고샵으로 가 ‘오토바이 사러 왔어. 혼다 비전(당시 동료들이 가장 많이 샀고 나중에 가장 잘 팔릴 거라 했다) 중에 가장 안전한 새것 같은 걸로 줘.’라고 했다. 두 대의 오토바이를 보여준다. 빨간색과 검은색. 나는 검은색을 하려고 했는데 직원이 빨간색을 권한다. 오케이! 계약서를 작성하고 거금을 이체했다. 이제 됐으니 타고 가란다.


“나 오토바이 못 타. 집으로 배달해 줘.”

“뭐라고? 그런데 왜 사?”

“연습하려고.”


직원이 어이가 없는지 웃는다. 옆 가게에서 헬멧 두 개를 사고 그랩 타고 집으로 오니 오토바이 배달이 왔다. 덩그러니 집 앞에 놓인 오토바이를 보니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 같았다. ‘이를 어째….’ 경비원을 불러 오토바이를 지하주차장에 넣어 달라고 했다. 역시 의아한 표정. “내가 오토바이를 못 타서……” 그렇게 나는 일단 오토바이를 샀다.


다음 날 연습을 하기 위해 또 경비원을 불러 오토바이를 주차장에서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6월의 뜨거운 날씨 그중에 제일 뜨거운 오후 2시쯤, 사람들이 안 다니는 시간을 골라 집 뒷골목으로 가 시동을 걸고 연습을 한다. 며칠을 그렇게 연습을 했다. 두어 번 브레이크를 잡다 엑셀을 당기는 실수도 하고 유턴을 하다 넘어지기도 하며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배울 때처럼 오토바이를 ‘배웠다’ 아니 ‘익혔다’


몇 번 시도 끝에 아이를 태워본다. 어차피 아이를 두고는 어디든 못 가니 아이를 태우고 연습해 본다. 저속으로 달리며 넘어질 것 같으면 뜀틀 하듯 뛰어내리라 이르고 조심하며 연습했다. 이제 시내에 나가보기로 한다. 첫 시내 도전! 정말 저세상이다. 도로 위에 나선 순간부터 후회했다. 빵빵 소리에 내 옆을 스치는 오토바이가 뿜는 뜨거운 공기에, 차 경적 소리…. 문제는 얼마 못 가 사거리에서 발생한다. 신호를 받고 대기하다 초록불에 서서히 출발하려는데 내가 너무 느리게 간 건지 나를 넘어 추월하려던 오토바이가 내 오토바이 앞바퀴를 쳤고 나는 너무 놀라 브레이크와 엑셀을 다 당기며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백주대낮에 하노이 시내 사거리에서 아이를 태운 한국인 아줌마가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졌다. 갑자기 열댓 명 아저씨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오토바이를 세우고 나를 일으켜준다. 아이부터 살폈다. 다행히 아이는 멀쩡했다. 내 다리에는 피가 철철 흐른다. 팔꿈치도 피가 났다. 베트남 아저씨 한 명이 나를 친 젊은이에게 뭐라 훈계를 한다. 한국이면 경찰을 부를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들은 바로는 베트남에선 오토바이가 멀쩡하면, 아니 조금 깨져도 그냥 간다더라. 내 오토바이는 멀쩡했다. 무엇보다 나로 인해 사거리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을 못 참겠다. 실은 국제면허증이 인정되지  않는 베트남에서 당시는 무면허에 해당했기에 경찰을 부르기도 무서웠다. (그 후 오토바이 면허를 발급받았다) 그래서 일단 밖으로 오토바이를 옮겼다. 그게 끝이었다. 나의 사고 처리는. 경찰도 보험도 없이.


집으로 가는 내내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났다. 뒤에서 아이가 말했다.  “엄마, 괜찮아. 잘하고 있어.” 오토바이 사는 것을 반대한 남편에게 아이 태우고 넘어진 건 차마 말을 못 하겠어서 미적거리다 결국 말을 했다. 자전거도 못 타는 내가 오토바이를 타겠다 하니 어이가 없었겠지만 이번에도 말릴 수 없음을 그도 알 수밖에.


그렇게 나는 오토바이 운전자 아니 소유자가 되었다. 지금 나는 현지인처럼 다닌다. 그 오토바이로.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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