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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억만개의 치욕 Oct 29. 2024

My story

b4.  중독 - 반성문

<젊고 멀쩡해 보이는 알코올중독자들의 나라->

8개월 전 방영한 추적 60분 프로그램 제목이다. 이 다큐를 보고 처음으로 내가 '알코올사용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젊고(아닌가?) 사회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알코올중독자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젊지 않고 멀쩡해 보이지 않는대도 알코올중독은 맞는 것 같다. 내가, 이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의 판단력과 자유의지가 기능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고 내 스스로가 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실이다.


이틀 전 토요일 저녁 약속 자리에서 삼겹살과 육회를 안주로 하이볼 한 잔, 맥주를 4-5병 마신 것 같다. 그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단골 치킨집에 들러 측정불가 정도로 새벽까지 마셨고, 눈 떠보니 집이었다. 집에는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고, 대략 시간으로 추정해 보면 10시 정도부터의 기억이 없다.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잤던데 이 역시 기억에 없다. 또! 필름이 끊겼다. 롬복에서 돌아온 지지난주 토요일부터 절주를 다짐하고 보낸 1주일이었다. 주 1회만 마시자는 생각이었는데 주 1회에 1주일치를 폭음하는 것이 무슨 절주인가 싶다. 올해 들어 술을 마시면 필름이 자주 끊긴다. 집에 잘 와서 잘 씻고 잔 날도 드문드문 기억에 버퍼링이 걸린다.


작년부터 술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크게 필요성이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작년부터는 '이제 술을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해서 3주 금주, 45일 금주 등에 도전하면서 적어도 나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술을 끊을 수 있는 비중독 자유인임을 증명하고 안도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이미 끊기 힘든 중독의 상태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중 3 때 처음 맥주를 입에 댔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한 모금 마셨을 때 나는 ‘고소했다’. 고2 때 야자를 째고 친구랑 방파제에 앉아 밤바다를 보며 맥주캔을 딴 적도 있고, 노는 친구들과 간간히 몰래 맥주를 마신적도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입학식부터 나의 알코올 라이프를 본격화했고, 비 오면 비 와서, 해나면 해나서, 바람 불면 바람 불어 마셨다. 학교 앞 학사주점, 당시 유행했던 편의방, 호프집, 대패삼겹살집, 주물럭집, 학교 잔디밭 가리지 않고 마셨다. 좋았다. 술맛도, 분위기도…. 새우깡에 맥주 피처를 마셔도 좋았고 가끔은 나의 내장이 범람해 오바이트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술은.


나는 맥주만 마신다. 소주나 양주, 와인은 맛없다. 맥주의 탄산과 보리의 고소함이 좋다. 배고플 때 먹는 맥주가 제일 맛있고 열받을 때 먹는 맥주도 기가 막힌다. 퇴근해 손만 씻고 애들 밥을 서두를 때도 일단 한 캔 따고 벌컥벌컥 마시고 시작하면 살 것 같았다. 호프집의 캐주얼한 분위기와 얼음잔에 나오는 생맥주는 생각만 해도 유쾌하다. 그렇게 나는 26년, 아니 그 이상을 맥주와 함께 했다. 임신 기간 2년과 수유기간을 제외하고 나는 맥주를 쉰 적이 없다.


주 1-2회 맥주를 마셨고 가끔 취했고 한 달에 한 번은 과음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나는 ‘그러려고 술 먹는다’며 변명했고 나의 알코올 동지들 또한 ‘괜찮다. 다 그런 거지 ‘하며 각자를, 서로를 정당화했다.


하노이는 물보다 맥주가 싸다. 처음 우리 돈 만원에 스무 캔을 사고서 천국이구나 싶었다. 낯선 곳에 적응한답시고 홀짝홀짝 마시다가 알코올 전사들을 만났고 그들과 같이 마셨다. 주 2-3회는 함께 마시고 다른 날은 혼자 한두 캔 마시다 보니 마시는 횟수도 양도 늘었다. 그러기를 2년 하고 알코올 전사들이 귀임하면서 술을 좀 줄여보자 했는데 이제 아주 술집 사장과 친구가 되어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제 술이 잘 안 깨고 회복이 늦다는 것이다. 몸이 술을 못 이기고 정신은 더 못 이기는 형국이니 이제 ‘다 됐다 ‘ 싶어 서글프다. 블랙아웃이 자주 되는 것도 문제다. 물론 한번 마셨다 하면  끝을 보는 이놈의 잘못 배운 술이 원인이다.


이제 나는 늙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술이 술을 마실 뿐 내가 술에 져버린 지 오래다. 술로 인해 업무나 가사, 육아에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분위기를 좋아하는 거라고도 생각해 봤는데 아니, 나는 맥주를 좋아하는 거다. 근데 그런 내가 늙었다. 늙은 여자가 취해 비틀거리는 것은 추하고 사연 있어 보인다. 나는 이제 청춘이 아니라서 내 청춘과 이별해야 하고 그러려면 술을 끊어야 한다.


끊는다는 말은 참 날카로워 싫다. 인정머리 없다. 굳은 결심을 하고 단주를 실행할까 싶다가도 ‘ 인생 뭐 있나 ‘ 싶고 좋은 거 하고 살다 죽자 싶어 또 결심을 포기한다. 근데 때가 오고 있음을 느낀다. ’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싶다가도 갑자기 내리는 비에 ‘ 한잔’ 생각을 한다. 단주는 못하겠고 절주에 돌입한다. 주 1회 4병 이하로만 먹어보겠다.


근데 왜 아예 끊고 싶지는 않은 거지? 그래서 나의 반성문은 미완이다.


나는 젊고 멀쩡한 알코올중독자다. 늙어가고 안멀쩡해지는 중인 알코올의존자다. So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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