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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억만개의 치욕 Oct 01. 2024

My story

b1. 쓴다는 것

어쩌다 보니 글을 써야 하는 일을 한다. 전 직원들에게 공지사항을 안내하는 사소한 글쓰기부터 계획서나 보고서, 가끔은 민원에 대한 답변서 등을 쓰기도 했다. 물론 대단한 창작이나 예술적 차원의 글쓰기는 아니다. 업무 상 쓰게 되는 것들이지만 가끔은 내가 쓰고도 은밀하게 만족할 때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어 습득이 빠른 편이었고 말하기, 읽기, 쓰기에 어려움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백일장 수상은 물론 교내 방송 기사, 졸업식 송사, 스승의 날 행사 편지, 졸업앨범 사진 카피와 편집 소감문 등 글쓰기와 관련된 일들은 자연스레 나에게 주어졌다. 쓰기보다 말하기 분야에서 더 인정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대중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요즘 애들 말로 '관종' 비슷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초, 중, 고 반장 선거에서 태연하게 연설을 잘도 했고 공식 회의나 토론에서도 소위 '조리 있는' 말솜씨를 뽐냈다. 나의 생활기록부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논리적', '조리 있는' 일 정도이니 말하기, 그리고 그 바탕인 글쓰기는 나의 어린 시절 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쓰기의 실력(?)이 가장 빛을 발했을 때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첫사랑 남학생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이다. 나라는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 대부분이 그 시절에 생산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나의 아름다운 청춘에 말과 글은 꽃처럼 피어났다. 그때 나는 썼다. 편지지뿐 아니라 편지를 쓸 수 있는 모든 것에 썼다. 온 세상에 대고 썼다.(영어 사전에서 love 페이지를 찢어 형광펜으로 칠한 후 그 옆에도 썼고, 지폐에도 썼고, 냅킨이나 휴지에도 썼고, 껌 종이에도 썼고, 과자 상자에도 썼다)낮에도 썼고 밤에도 썼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둠이 가라앉는 밤이다.'나 '빗소리가 마음을 두드린다.'류의 세상 유치하고 낭만과잉인 문장들을 썼던 것 같다. 지금은 영혼이 메말라서 그때와 같은 문장들은 어려워졌지만 그때 내 손 끝으로 풀려 나가던 나의 마음과 보송보송한 문장들의 감각은 뚜렷하다.


대학에 가서 리포트를 쓰거나 논술 시험을 볼 때도 글재주(?)의 덕을 좀 보았던 것 같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글 쓸 일을 맡아하게 되었는데 특히 대입을 앞둔 고3 학생들의 자기소개서 작성이나 논술지도에 있어서는 나 스스로도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자소서는 단순한 글쓰기 스킬보다 자료 분석과 쓸거리를 추출하는 작업이 더 중요한 데 그 모든 과정이 재미도 있었지만 뭔가 재능을 인정받는 것 같아 그 자체로 우쭐했었다. 그때는 글을 잘 쓰는 것이 살아가는 데 참 유용하구나라고 생각했고 '나는 글 좀 쓴다'는 착각, 적어도 나는 원하면 '잘 쓸 수 있다'는 큰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틀렸다.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적어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서른이 되었을 때, 마흔이 되었을 때, 각각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었다. 에세이도, 소설도 구상했었는데 시작을 할 수 없었다. 늘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소멸되어 버렸고 손 끝으로 나오는 글들은 죄다 식상했다. 나는 글을 쓰지 않았고, 업무 상 필요한 최소한의 쓰기만 하며 살았다.


그래도 읽으려 노력했다. 바빴지만 독서 모임을 꾸려 한 달에 한 권은 독서 토론도 했고, 그 외 개인적으로도 많이 읽으며 문장을 느껴보려 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메모하기도 하고 책에 밑줄을 그으며 문장들을 감각하고자 했지만 내 마음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폐광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잊었다.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아주 오래전에 브런치라는 글쓰기 앱을 알게 되었는데 그땐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가 정말 충동적으로 회원가입을 한 것이 정확하게 3일 전의 일이다. 그러고 두 편의 글을 급하게 쓰고 작가 신청을 하게 된다. 묘한 기대와 사실되어도 문제인 것이, 바쁘기도 하거니와 매번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끝까지 지켜나가지 못한 나와의 약속들이 망령처럼 떠올라 '될 대로 돼라'는 심정이었는데...


묘한 것이 '쓸 자격'이 내게도 있다는 승인을 받은 것 같아 이제 정말 뭐라도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인 것이다.


마음속에 담아 둔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지금도 힘들다. 그래서 블로그에도, 세줄 일기에도 모두 실패한 내 하노이 생활 정리를 목표로 시작했다. 언젠가 내 이야기로 치유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이렇게 시작을 한다.


쓴다는 것.

그것은 나의 오랜 목표이자 희망이다.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쓸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쓰이는 것을 쓰겠다. 쉽게 쓰이면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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