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 주변인
주변인, 아웃사이더..... 그냥 왕따?
살면서 나의 위치를 인간관계의 지정학 속에서 파악하게 될 때, 적잖이 당혹스럽다. 나는 불편하다. 사람들이. 정확하게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친절과, 천박하고 견고한 욕망의 구조와, 그들의 잔인한 사회적 구별 짓기가 불편하다. 소위 배운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저급해질 때,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낀다. 가끔은 그런 불편을 느끼는 내가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교양 있고,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큰 고난 없이 살아온 악의 없는 사람들일 뿐인데 내가 삐뚤어진 인간이라 그럴지 모른다고.
그렇다. 나의 이 불편은 질투와 시기, 더 나아가 열등감과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자격지심과 콤플렉스일지 모른다. 그러나 1인분도 못하는 동료 아무개가 S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선망받을 때, 인서울 대학을 나오고도 그놈의 sky에 졸아버리는 또 다른 동료와 대화할 때, 출신 대학으로 소고기 등급 매기듯 인간 등급, 아니 인생 등급을 미리 매기는 짓거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역겨워서 화가 난다. 반박도, 호응도 힘든 건 내가 지잡대 출신이라서가 아니다.(아니라 믿고 싶다) 집단의 평균에 맞춰 나를 낮추기 싫어서다. 학벌이 아닌 능력과 인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평가 자체가 문제인 것은 논외로 하고)는 고사하고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채 부분적인 사실만으로 사람을 평가해 대는 것은 너무나 천박하고 불쾌하다. 이 모든 서열화를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는 문화에 나는 반대한다.
관리자들에 대한 과한 의전이나 호들갑스러운 용비어천가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자기 이익 앞에서 양심도 자존심도 쉬이 내던지는 인간 군상들을 보고 있자면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사실 관리자와 관계가 나빴던 적이 없다. 오히려 관리자의 신망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고 가끔 업무적으로 관리자와 대척점에 서게 될 경우에도 인간적으로는 관리자들과 잘 지냈다.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나 갑질에 저항했지만 적어도 나는 대화와 설득의 힘을 믿는 지성인이고자 했고, 당당하게 내 의사를 표현했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였다. 정작 관리자들이 아닌 다른 동료들이 더 불편해했고 지금까지 동료들과 몇 번 스파크 튀기며 부딪쳤었다.(모두 까라면 까야한다던 내 또래 남자 동료였다. 나대는 여자를 싫어하는)
올해 초 나는 전체 회식이나 부서 회식에 불참을 선언했었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도 부서 회식 정도는 참석했지만 전체 회식은 가끔 불참하거나 얼굴만 비추고 나온 적도 있는데 왁자지껄 시끄럽고 의미 없는 찬사만 늘어놓는 게 싫어서였다. 나는 소수의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화학적으로 교감하는 진실한 대화의 장을 선호한다. 힘들고 지치는 인생 같이 위로 나누며 도닥여주는 자리들 말이다. 인간적으로 정말 저급한 동료와는 밥 먹는 자리도 불편하고 업무상 필요한 형식적인 얘기 외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회생활 힘든 유형인 것이다. 립서비스를 못하겠다. 영혼 1그램도 없이 ‘부장님 오늘 너무 예쁘세요~’하는 동료, 후배들을 보면 낯이 뜨거워 죽겠다. 문제는 그러고 돌아서서 서로 씹어대는 사람들을 보는 고통이다. 도대체 의리라고는 없다. 한 번을 양보하는 법도 없다. 교묘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남을 깎아내리고 그 위에 서려한다. 게다가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낚아채고 자신의 실수는 나몰라라 하는 염치없는 인간들도 많다. 그래서 힘들다.
나는 열심히 하는 편이고 그래서 업무적으로 싫은 소리를 듣는 경우는 잘 없었다. 아니, 너무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물론 실수도 한다. 그럴 때는 최선을 다해 미안해하고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원칙을 중시하는 편이고 공적 정의감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극 F인 나를 완전 T로 읽어주는 내 동료들은 나를 완벽주의자라 했다. 참으로 무성의한 평가다. 일상생활에서나 업무 중에 사용하는 어휘들이 관념적이고 진지한 경우가 많아 더더욱 그런 이미지가 굳어졌다. (진지충이라니!) 요는, 내가 대부분의,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고 그로 인해 잘 섞여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특별히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데도 나는 항상 사람들이 불편했고 코드가 맞는 소수의 사람들과만 교류하게 된다.
왜일까?
흙수저 아니 무수저로 태어나 어릴 때 머리 좋다는 소리 좀 들었는데 초등 고학년 즈음 시청 공무원, 개인택시 기사, 약사, 대기업 정규직의 부모를 둔 친구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면서 가난한 집 수재라는 비참 속에서 10대를 맞았고 나는 방황했다. (아버지는 비정규직 현장 노동자였다) 고등학교 때는 그나마의 성적도 급락했고 그다음은 일탈과 비행이었다. 지방대라도 나와 겨우 시험 쳐서 직업을 얻었으나 그 안에서 또 끝없이 반복되는 서열화 지옥에 환멸을 느낀다.
어렸을 때 나는 반장을 도맡아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먹고사니즘으로도 하루하루 벅찼고 자녀 교육 따위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학교에 거의 오지 않았다. 그 시절만 해도 좀 사는 집 부모들은 어린이날에 학급 전체 아이들의 간식을 사 오거나(당시 600원이나 했던 고급 초콜릿 '블랙로즈'를 모든 반 아이들에게 돌렸던 큰 한식당집 딸 oo의 의기양양했던 표정과 초콜릿 껍데기에 새겨진 빨간 장미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왜일까) 각종 학교 행사에 적극 참여했고 그만큼 파워를 행사했다.(지금 학부모회는 그렇지 않다)
그래도 공부도 잘하고 나서기도 좋아했기에 나는 내 자리를 찾아 열심히 바둥거렸던 것 같다. 내가 느낀 불공정의 첫 경험은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당시 나는 교내외 각종 백일장에서 수상을 했고 이것저것 감투를 좀 쓰고 있어서 잘 나가는 아이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옆반 담임 이 나를 불러 독후감 하나만 써달랬다. 졸업을 앞두고 대외상(성적과 가산점 합계 1등이 교육감상을 받았다) 수여를 위한 성적 사정 과정에서 학부모 회장 아들의 점수가 조금 부족했었고 그 반의 담임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교내상을 주어 부족한 점수를 채우기 위해 나를 이용한 거다. 나는 대필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사실대로 나에게 말하며 나중에 맛난 것을 사주겠노라 했던 그 여교사를 잊을 수 없다.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중학교 때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지고 성적도 잘 나왔는데 나는 중학교에 가서 부모의 직업이 자녀의 서열이 되는 경험을 한다. 모 중공업에 정규직(직영), 비정규직(외주), 그나마도 안 되는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아버지의 딸이었다 나는. 참 가난하게도 가난해서 엄마도 험한 조선소 용접공으로 일하러 갔다.(직업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노동자들의 땀을 존경한다) 그때 나는 부모를 부끄러워했고 그런 나를 더 부끄러워했다.
그래, 양지에서 못 올라가면 음지에서 올라가자. 그렇게 삐뚤어졌다. 고1 때 책을 놓았다. 처절했던 방황의 끝은 더 처절했다. 그나마 지방대라도 간 건 수능 덕이다.(내신은 바닥이었는데 수능은 그래도 잘 나오는 편이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줄 알았다) 대학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동창 찾기 사이트가 유행했는데 어렸을 때 친했던, 경쟁했던 친구들이 모두 내로라하는 대학에 다니며 나의 근황을 물어 왔는데 정말 비참했다. 나는 그 후로 어떤 SNS도 하지 않는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나는 묘한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진골 성골이 아닌 육두품 같은 기분. 열심히 일했고 인정도 받아봤지만 기회주의자들, 줄 잘 선 자들의 승진을 지켜봐야 했다. 아첨하고 돌아서서 까고 또 아첨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적 우월감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그래도 좀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왜일까?
내가 불행했다는 말이 아니다. 불편했고, 지금도 그런데 그 이유가 뭔가 생각해 보는 거다. 첨부터 다른 리그를 뛰었던 건지(마이너리그?), 타고난 기질인지, 환경에 의해 떠밀린 건지 찾아보는 중이다.
모두 다가 아닐까.
쓰고 보니 아주 배배 꼬인 찐따 같은데.. 사실 나는 안 그런 척 살고 있다. 안불편한 척. 그래서 불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