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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질병일까?

by 이성규

亂離袞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세에 떠밀려 백발이 성성하도록

幾合捐生却末然(기합연생각말연)

목숨을 끊으려다 그만둔 것이 몇 번인가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오늘은 참으로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공을 밝히구나


絶命詩(절명시) 중에서 / 황현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시인인 매천 황현 선생은 1910년 한일합병령이 민간에 반포되자 바로 그날 이 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근 들어 자살을 병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점차 짙어지고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도 그런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연구팀은 제2번 염색체에서 조울증 환자의 자살 충동을 유도하는 변이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조울증 환자들 중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을 비교한 결과, 제2번 염색체 중 하나가 변이된 사람은 1.4배, 두 쌍 모두 변이된 경우는 3배 정도 자살 충동이 일어날 위험이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자살에 관한 열망이 높은 사람일수록 특정 화학물질의 수치가 높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됐다.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포함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자살 시도 후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과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루타메이트의 활성을 측정한 결과, 자살 시도자들이 2배나 높은 수치를 지니고 있음을 밝혀낸 것.

이 수치를 감소시켰을 때 실제로 자살과 관련된 행동이 놀라울 정도로 줄어든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글루타메이트는 신경세포들 사이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아미노산으로서, 오래 전부터 우울증과 관련된 화학물질로 의심받아 왔다.


혈액 속에 있는 특정 단백질 수치의 상승이 자살 가능성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 연구팀이 남성 조울증 환자와 자살한 남성들에게서 채취한 혈액 샘플을 분석한 결과, SAT-1이라는 단백질의 수치가 높을수록 자살 위험이 높게 나타났다는 것.

이 연구결과들이 실용화될 경우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자살 위험을 미리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약물이 출시될 수 있다. 실제로 자살 사망자의 약 90%가 사망 1년 전에 의료기관을 방문하며, 1개월 이내 방문자가 76%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하지만 미국 정신의학회 및 세계보건기구 등의 진단지침에 자살이라는 병명은 없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자살을 병으로 규정하는 데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만약 자살을 치료해야 할 병으로 취급하게 되면, 치료 받아야 할 대상만 있을 뿐 자살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 우리의 현실을 감안할 때 자살은 이미 개인 문제가 아닌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자살론’을 쓴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은 “자살은 도와달라는 마지막 호소다. 그러나 너무 늦은….”이라고 정의했다. 너무 늦기 전에 자살이라는 심각한 사회적 질병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조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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