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유광 Nov 18. 2024

고통의 정의

죽음 2

https://brunch.co.kr/@35b80a466a3347f/3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

어느 한 주말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득 오랜만에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말이었지만 친구의 반응은 달랐다.


어디냐는 질문, 뜻 없이 건넨 첫마디였다.

오고 있냐는 대답에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받아넘겼지만, 무엇인가 이상했다.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수화기 건너편으로 들리는 떨리는 목소리.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한 명이 또 내 곁을 떠나갔다.

급하게 전화를 끊어내고 서울에 사는 다른 친구에게 연락을 걸었다.

덤덤하게 전화를 받은 친구의 대답은 이따 보자. 조심히 와. 딱 두 마디였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으며 버스표를 예매했다.


기대를 안고 가는 형형색색의 서울의 모습과 다르게 내가 도착한 서울의 모습은 잿빛의 황연이었다.

막히는 도로, 시끄러운 소리,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심지어 밝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흑백 브라운관을 떠올리게 했다.

택시에 올라타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친구의 곁으로 도착하고 지하 휴게실로 갔다.

자녀상을 당하신 어머니는 누구의 접객도 받지 않으시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으셨다.

어머니와의 인사를 뒤로 한 채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모두 지쳐있는 표정.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나와 몇몇은 흡연실로 걸음을 돌렸다.


궁금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차마 물어보지 못한 사인.

사고사였다.  혼자 흡연하러 나간 사이 추락사를 당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방문은 부모님께서 알리고 싶지 않으셔서 서울에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만 내용을 전했다고 한다.


흡연장에서 담배만 피우던 우리는 친구에게 입혀줄 의복을 사러 간 친구를 기다리며 한 명, 두 명 올 때마다 흡연실로 나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없이 늘어만 가는 담배꽁초. 티는 내지 않지만 타들어가는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듯 연초는 계속 타들어갔다.


장례식장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오가는 술잔이었지만, 웃음기는 없었다.

간혹, 누군가 던지는 농담만이 우리의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다음날,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처음 그곳으로 돌아왔다. 

식사를 하고 분향소로 떠났다.

분향소에 도착했을 때 운구차에서 친구가 내렸다.

어머니의 절규, 우리는 누구 하나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아무리 친하다 한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원통보다 깊을 수 없다.


화장시간, 흡연장으로 나갔다. 기다림의 시간동안 할 수 있는 건 흡연뿐이었다.

그곳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밝은 색의 가루로 바뀐 친구의 모습을 보니, 항상 밝은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독 하얗던 피부, 주변을 밝게 해 주었던 친구. 마지막도 깨끗한 흰색이었다.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 까, 만나자고 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나가 친구의 모습을 눈에 담을 것을

후회도 늦었다. 눈앞의 새하얀 가루. 그것이 지금의 결과다.

한참을 울고 다시 납골당으로 향했다.


이사 갈 친구의 집으로 이동했다.

새로 살 집이 정리될 동안 잠시 대기했다.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집을 얻은 친구에게 다가갔다. 하나 둘 친구의 집에 노크를 하며 말을 걸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감추고 있던 슬픔이 현실이 되어 버릴까 봐. 이 한마디면 영영 친구를 볼 수 있을까 봐.

덤덤하게 말을 하는 친구들의 인사는 이미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 나도 말을 걸었다.

그때부터 참았던 눈물, 주채할 수 없는 감정이 현실이 되어가고, 현실 속에 있었던 나의 목소리 마저 감정과 바뀐 채 잠겨가는 목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말을 전했다.

이제 끝이다. 자주 올게. 너와 함께한 시간은 잊지 않을게. 지금까지 나와 너의 시간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장면만이 익숙하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상실의 두려움에 빠져있던 나는 인생의 두 번째 상실을 느끼게 되었다.


고향에 도착한 당일. 원래 있었던 술약속을 나갔다. 혼자 집에 있으려니 자신이 없었다.

나의 상황을 아는 것은 세명 중 한 친구만이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약속 장소로 도착하여, 한 잔, 두 잔 그저 술만 마시고 있었다.

흡연을 하러 나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에서부터 슬픔을 가지고 온 나,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밝게 자리를 이어갔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눈물.

내가 겪은 친구의 죽음을 보고 만약 자신의 상황이 내가 죽은 상황이었다면, 자신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참아왔던 슬픔과 친구의 진실 어린 눈물에 무너졌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닦아주면 내 안의 슬픔이 종잡을 수 없이 커져갈 거 같아 머리만 토닥였다.

이미 양쪽 두 눈에 가득 차오른 상실의 결정채를 꾹꾹 눌러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득한 밤이 깊어가고 눈물 섞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

처음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나의 세상이 넓어졌다.

그날의 어두운 저녁과는 반대로 한 없이 짙은 새벽이 제법 밝아보였다.

칠흑 같던 어둠이 도사리던 나의 세상에 살며시 안개가 걷히고 황혼이 다가왔다.


집 안의 어려움. 유복하지는 않았던 가족환경. 무난한 학창 시절. 친구의 죽음.

재미없던 나의 인생의 나열이다.

고통과 지루함이 반복되는 나의 일상에 어둠 속 한줄기의 햇빛이 나를 비추고 있다.

고통으로 무너져가고 있던 나는 이번 두 번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 치도 못했다.

절박했다. 칠흑 속 나를 겹겹이 막을 쌓고 있는 이 무엇인가를 깨고 나에게 다가올 황혼을

더 깊이 더 깊이 칠흑 속으로 묻혀가던 날, 나의 칠흑 속 한 줄기 무엇인가 들어왔다.


우리 모두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날 친구의 눈물 또한 위로를 받고 싶었던 나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미 부여였을지 한 순간 스쳐 지나가는 대화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칠흑 같던 나의 삶의 황혼이라 부르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고통의 정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