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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현 Oct 27. 2024

차범근과 박지성이 편함을 놔두고 유럽에 간 이유

‘월드컵 이후 한 국내 프로축구팀이 백지수표 계약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믿고 지도해 준 감독님이 있는 해외 팀으로 갔습니다. 유럽 축구 무대에 가야겠단 생각을 해왔던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에 발탁돼 골을 넣고 우리나라를 사상 첫 월드컵 16강에 올려놓은 박지성 선수가 월드컵 후 행보에 대해 한 말이다.


손흥민이 30살을 넘겼단 기사 내용을 보고 문득 떠오른 우리들의 캡틴 박지성 선수 관련 영상을 찾아보던 중 그가 출연한 방송 다큐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KBS 대화의 희열을 비롯 MBC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 프리미어리그 짤 영상까지 한국 축구 전설을 다룬 다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2002 월드컵 후 박지성 선수가 받은 백지수표 계약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간략히 설명하자면 백지수표는 지급 금액이 적히지 않은, 정해지지 않은 수표다.


수표 수령인이 받길 원하는 금액을 적으면 지급인은 책임지고 그 금액을 마련해야 한다.


10억 원을 적고 서명·날인을 마치면 무슨일이 있어도 10억 원을 마련해 지급해야 하고 100억 원이면 100억 원을 수령인에 지급해야 한다. 무한대로 적을 수 있는 로또보다 더한 돈인 셈이다.


KBS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박지성 선수도 국내 프로구단이 백지수표 계약을 제안한 걸 조심스레 말하자 옆에 있던 유희열이 ‘지금 되게 후회하고 있는데’라며 표정을 스케치했다.


박지성도 그랬고 기성용도 그랬고 이청용도 차두리도 구자철도 지동원도 김보경도, 심지어 차범근도 해외 생활을 마치면 어김없이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해외에 마련한 집과 차를 처분하면서까지 우리나라로 돌아온 건 어쩔 수 없는 해외의 이질적 문화와 환경 탓이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해외서 10년을 뛰어도 태어나면서 20년을 지내고 자란 우리나라 문화와 식습관이 박혀 아무리 구단이 잘해 줘도 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은, 일종의 향수병인 셈이다.


박지성 선수도 영국 생활 당시 현지 음식이 맛있단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자서전 ‘꿈을 향해 뛰어라’에선 비행기서 기내식으로 나온 라면이 정말 맛있다고 표현했지만 영국 현지 음식이 맛있다고 표현한 문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박지성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서 뛴 차범근 선수도 바이엘 레버쿠젠서 은퇴한 뒤 우리나라로 영구 귀국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서 UEFA컵, DFB포칼컵 우승을 일궈내고 현지 레전드 선수인 칼 하인츠 루미니게와 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한테 극찬을 받았던 그마저도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현지에 남지 않고 돌아왔다.


그만큼 해외 생활이 국내보다 불편하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굳이 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외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문구로 요약해 말하자면 ‘경쟁과 실력’이다.


우리보다 월등히 높은 실력, 깊은 역사, 끈끈한 유관 관계, 체계적 조직, 선진화된 문화를 갖춘 그들과 부딪치고 경험함으로써 배우고 느끼고 몸으로 터득하기 위함이었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전부터 우리나라서 축구를 제일 잘 하는 선수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만 19살 때 국가대표로 발탁돼 아시아 월드컵 예선을 뛰었다.


1974년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 뛰며 최종예선까지 갔지만 번번히 호주에 막혀 월드컵 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2006 독일 월드컵 특집 다큐에 출연한 차범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시아서 최고란 소리도 듣고 칭찬도 들었지만 세계 축구의 벽은 높았다. 해외 선진 축구를 만나면 두렵고 몸이 굳었다. 이런 내 자신에 굉장히 불만족스러웠다’


차범근이 동경한 무대는 1970~80년대 세계 무대를 뒤흔든 독일 분데스리가였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우승, 1970년 멕시코 월드컵 3위,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승의 화려한 역사와 베켄바우어, 루미니게, 마테우스를 보유한 독일 축구의 핵심은 분데스리가였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축구연맹(FIFA)로부터 4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받고 10여 년만에 월드컵 무대에 출전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독일(서독) 주장은 프린츠 발터. 오늘날 독일엔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이 있을 만큼 발터는 독일 축구 역사서 빼먹을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다.


페렌츠 푸스카스, 콕시스, 보시츠키라는 전설의 공격수로 3각 편대를 구성해 거침없이 공격을 퍼붓는 헝가리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며 줄리메컵(당시 월드컵 우승트로피 명칭)을 들어올린 발터는 전국 각지 흩어진 축구 대회를 하나의 리그로 뭉쳐야 한단 의견을 내비쳤다.


이후 1963년 분데스리가가 출범했고 프린츠 발터는 통산 397경기 출장, 306골이란 대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우리나라 프로축구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83년 K리그 전신인 슈퍼리그가 출범한 것까지 합해도 역사가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독일은 분데스리가 출범 역사만 따져도 60년이 넘는다. 축구 종주국 영국은 140년이 넘는다.


박지성이 뛴 PSV 아인트호벤이 있는 네덜란드 프로리그 에레디비지에는 13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수백 년 전부터 조직적 프로리그를 갖추고 뛴 그들과 실력을 겨룰려면 그만한 체계적 시스템과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그들이 뛰는 곳에 직접 가서 몸으로 부딪치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따라가고 경쟁하고 실력을 겨뤄야 하는 이유다.


박지성, 차범근, 손흥민이 편함을 놔두고 해외로 나가 불편함을 감수하며 최선을 다해 실력을 겨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 인판티노 FIFA 회장은 아시아 3개국이 16강에 오른 것을 칭찬했다.


그러며 ‘더 많은 국가가 월드컵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월드컵 참가국은 32개국서 48개국으로 늘어났다.


얼핏 들으면 좋은 얘기지만 한편으론 씁쓸한 얘기기도 하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당시 유럽과 남미선 10개국이 16강에 올랐다.


우승은 남미 아르헨티나가, 준우승은 유럽 프랑스가 차지했다.


이에 대해 인판티노 회장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만큼 수준, 실력면에서 아시아는 아직 유럽·남미에 떨어진단 인식으로 읽혀지는 씁쓸한 현실이기도 하다.


언제쯤 우리나라는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우리나라로 가져올 수 있을까.


청소년 대회선 여자 대표팀이 17세 이하 월드컵서 우승하고 남자 대표팀이 20세 이하 대회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성인 대표팀 최고 성적은 우리나라서 열렸던 2002 월드컵 4강이다. 결승 무대는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박지성, 차범근, 손흥민에 이은 또 다른 한국 축구 해외파 리더가 나오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월드컵 결승 무대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뛰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사진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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