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백 년의 고독'이라는 소설을 완독 했다. 소설 첫 장부터 한 가족의 가계도가 나오는데 이름이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이런 식이다. 사람마다 이름이 최소 10글자이고 조상의 이름이 후대에 반복돼 등장인물을 식별하는 것만으로도 소설 읽기의 큰 진입장벽이다. 실제로 전에 이 문제 때문에 이 소설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걸 적응하고 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술 읽게 되는 엄청난 소설이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내용은 6대째 이어지는 한 가족의 고독, 비극과 희극 그 어딘가의 삶이다. 소설 속 대부분의 가족이 고독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고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답으로는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며, 그 고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따라서 '인생은 원래 고독하다.' 나의 철학적 사색은 이렇게 시시하게 끝.
그러다 갑자기 냉동실이 떠올랐다. 요즘 모든 글의 주제를 음식으로 삼고 있다 보니 냉장고 안에 뭐가 있나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문득 냉동실은 나의 관심 밖이자 우리 집에서 가장 고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냉동실에서 꺼낸 건 문간에 놓인 냉동밥, 낫또, 초콜릿이 전부이니 말이다.
고독한 냉동실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니 가히 슈퍼마켓을 방불케 하는 라인업이다. 우럭, 보리굴비, 병어, 전복, 해물믹스, 삼겹살, 떡갈비, 구이용 소고기, 국거리용 소고기, 훈제오리, 국밥, 들깨탕, 냉동만두, 연잎밥, 냉동 블루베리, 이름 모를 나물들, 죽순, 청양고추, 다진 마늘, 먹다가 상할까 봐 얼려 놓은 토마토소스, 미나리페스토, 자투리 야채들까지.. 누가 보면 살림 잘하는 집인 줄 알겠으나 현실은 홈 오거나이제이션이 좀 모자란 부부의 냉동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냉동실에서 가장 곤란한 식재료는 죽순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죽순 삶은 것을 보내주셨는데 너무 많이 보내주는 바람에 남은 것을 어찌할지 몰라 그냥 냉동실에 다 넣어버렸다. 내 머릿속에는 죽순 요리는 죽순들깨무침만 떠오르는데 그걸 내내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연휴에 남편이 해물짬뽕을 하겠다고 냉동실의 죽순을 꺼내 쓴 것이 아닌가. 잠시 '이 사람 천재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맞아, 죽순에 딱 맞는 자리가 있었지. 백일 동안 고독했던 죽순은 그렇게 구조되었다. 냉동실에서 해물믹스와 전복까지 구해내는 그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죽순해물짬뽕
죽순이 주인공 같은 해물짬뽕을 먹으며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내 눈앞엔 거대한 전복, 새우보다 빨간 국물을 머금어 간이 적절히 밴 죽순밖에 안보였다. 예전엔 짬뽕을 시키면 죽순이 들어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고급 중식당이 아니면 죽순이 들어간 짬뽕을 보기가 힘들다. 죽순은 등장만 해도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는 빛나는 카메오 같단 말이지. 죽순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는 오늘처럼 요리를 할 때마다 냉동실에 있는 식재료를 한 가지씩은 꼭 꺼내 쓰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냉동실에 한 번 들어간 식재료들은 좀처럼 손이 가지 않고, 심지어 시간이 좀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져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또한 언젠가 먹을 것 같긴 한데 버리긴 아깝고 딱히 쓸 일이 없는 목숨이 간당간당한 계륵 같은 식재료도 내 눈을 피해 냉동실에 넣어버리면 죄책감이 덜하다. 그렇게 '1 요리 1 냉동실 구조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기술의 발달로 냉동실의 식재료들은 충분히 '백 년의 고독'을 느낄 수 있겠으나 식재료들은 신선할 때 먹어야 제맛이고 아무리 냉동실이 전지전능하다 하더라도 오래 두면 본연의 맛과 효능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냉동실의 식재료들은 '백일의 고독'정도만 두고 그전에 꺼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죽순처럼 제 자리를 찾는 아이들이 있겠지. 냉동실을 생각하니 머리가 조금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