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5월 두 번째 토요일
이제 날이 제법 따뜻해졌다. 곧 샌들을 꺼내 신어야 할 날이 올 듯하니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페디큐어.
나의 손톱은 항상 짧다. 손톱이 얇아 잘 찢어지는 데다가 조금이라도 길면 불편해 못 참는 예민한 구석도 있고, 가끔은 수술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은 다르다. 양말을 꼭 챙겨 신어야 하는 계절에는 발톱도 얄짤없이 짧게 다듬고 살면서, 발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여름만 되면 꼭 페디큐어를 받는다. 할로에게 보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마음이 진짜다, 멋 좀 부리지 말아라, 잔소리가 머쓱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발뒤꿈치 허옇게 일어난 각질만큼 보이기 싫은 것이 맨 발톱을 내놓고 다니는 것이니까.
하여튼, 페디큐어를 받으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필요하다. 아니, 뭐라도 붙이고 더 화려하게 하려면 한 시간 삼십 분은 있어야 한다. 이전에 다니던 곳은 꽤 거리가 있는 데다가 퇴근 후에는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렇다고 남편에게 발톱단장 좀 하고 오게 자유시간 두 시간만 주오, 하기에는 왠지 눈치가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토요일 할로의 뮤지컬 학원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이다. 토요일 오전 두 시간, 게다가 학원 근처에도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 네일숍이 있었다.
벌써 5월 중순인데 날이 춥다. 맨발로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난 오늘 페디큐어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회원 정액결제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할로를 데려다주고 네일숍에 갔다. 오늘은 비가 오지만 올해 첫 단장이니 산뜻하고 귀여운 노란색으로 컬러를 선택하고 늘 하던 것을 시작했다. 그것은 가계부정리. 손으로 쓰는 것은 아니고 앱을 사용한다. 내가 사용한 카드 내역을 그대로 연동시킬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쓴 돈의 내역을 일일이 확인하고 하나하나 손으로 두드려 입력시킨다.
나는 원래 가계부를 적는 알뜰한 주부는 아니었다. 작년 잠시 백수였을 때, 남편에게 생활비를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 상의할 목적으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매번 돈을 쓸 때마다 잘 정리하면 좋겠지만 어쩌나. 그건 왜 이리 어려운지. 가계부 쓸 시간을 따로 내기는 어렵고 페디큐어 받을 때 가계부를 정리하면 시간도 딱 들어맞길래, 언젠가부터 페디큐어와 가계부정리는 나의 작은 리추얼(ritual)이 되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지난해 11월부터는 페디큐어를 안 받아서 11월부터 3월까지 가계부는 쓰지 못했다. 3월 카드값에 놀라 4월부터는 다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미처 정리 못한 4월 마지막주부터 오늘까지 지출 내역을 정리할 것이다.
선생님이 내 발을 잡는 순간, 가계부 앱과 은행, 카드 앱을 열고 빠르게 손을 움직인다. 식비, 생활잡화, 미용의류, 교통비, 문화비, 의료비, 경조사, 공과금, 교육비, 보험 및 적금, 그리고 기타. 그렇게 큰돈 쓴 건 없다. 아이 학원, 보험, 적금 이런 것들을 적고 나면 나머지는 잔잔바리다.
컬*, 쿠*이 대부분이고, 가끔 배달음식들. 아이 학원 보내놓고 시간 때우기 위해 들어간 카페에서 2천 원, 3천 원씩 사 마신 커피 몇 잔. 3주 동안 인형 뽑기를 3번이나 했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양가 부모님 용돈과 선물, 어린이날 우리 할로와 조카들 선물.
그러고 보니, 선물 산다고 백화점 갔을 때 내 옷도 한벌 샀다. 그렇지만 그 옷은 몇 년 두고 입어도 질리지 않고 잘 입을만한 무난한 옷이니까.
아차, 화장품도 샀네. 피부과 시술과 화장품을 두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피부과를 선택했었다. 아직 그 패키지 관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화장품을 사버렸다. 역시 난 화장품도 사고 피부과 패키지도 끊을 여자였다. 그래도 내가 예뻐지면 나도 좋고, 내 기분이 좋으면 남편도 좋고, 아이도 좋고, 가정이 행복해지니까. 그렇게 위안 삼아 보지만 한편으로는 겁도 난다. 대체 4월 총지출이 얼마인거지.
가끔 카드내역을 보면 정말 도통 뭔지 모르겠는 것들도 있다. 저 4천 원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뭐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사업자번호를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대체 4천 원을 왜 썼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출내역 정리가 끝났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렇게나 많이 썼다고? 정말? 이게 내가 쓴 거야? 돈 쓰는 거 정말 쉽다. 큰돈 나간 건 없는데 언제 이렇게 많이 썼지? 다시 한번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내역을 살펴본다. 어딜 봐도 큰돈 쓴 게 없는데, 과소비한 것 없고 사치한 것 없는데, 모아보니 큰돈이었네. 아. 망했다. 그리고 대체 그 4천 원은 어디다 쓴 거지.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예쁘죠? 지금 5월 이벤트로 회원등록 하시면요.... ”
페디큐어가 끝났다. 역시나 정액제를 설명하는 사장님. 저 방금 가계부 정리했다고요. 오늘은 이것만 할게요. 가게 문을 닫고 나오는 발은 가볍고 마음은 무겁다.
발 끝이 예뻐졌으니 다행인 걸까. 가끔 카드값에 답답해지더라도 발을 보며 웃어보길 기대한다.
가계부는 냉정하고 페디큐어는 따뜻하다. 가계부는 내 삶을 관리하게 하고, 페디큐어는 내 삶을 위로한다. 가계부는 나의 숫자를 지키고, 페디큐어는 나의 기분을 지킨다.
발끝의 사치와 손끝의 절제.
차마 가계부에 오늘 페디큐어는 적지 못했다. 오늘의 페디큐어가 위로였는지 사치였는지 모르겠다. 할로에게 오늘 하기로 한 인형 뽑기는 다음에 하자고 해야겠다. 아, 이번 달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