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성향 존중하기 (5)
앨리스는 돌 전후에 심각한 발달지연이 있었지만 현재 발달 검사상의 점수로는 또래 평균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능은 ‘평균상’이며, 교육진단검사(PEP-R) 결과 (대근육 제외) 전 영역 평균 이상의 범주, 어휘력은 상위 ‘1퍼센트’(REVT 검사 기준)이다. 점수로만 보자면 ‘언어능력’은 또래보다 우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앨리스를 만나서 5분 정도만 직접 대화를 해본다면 발달검사의 점수라는 것이 아이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앨리스는 쉴 새 없이 말을 하느라 바쁘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그리고 태엽이 달린 인형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부산을 떨지만 정작 그 움직임은 매우 엉성하다. 그건 바로 앨리스가 자폐스펙트럼장애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고기능(평균 이상의 지능) 자폐스펙트럼이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양육자인 나조차도 아이의 장애를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앨리스는 (비록 본인 위주일지라도) 대화가 가능하고, 놀이도 가능하며, 학습은 아주 좋아하고, 자조도 또래만큼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흔들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일 때면 다시 한번 아이의 장애를 깨닫게 된다. 앨리스의 이러한 행동을 자기자극행동(Stimming)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표적인 자폐스펙트럼 증상 중 하나다.
이러한 앨리스의 자기자극행동은 돌 전후에 시작해서 15개월에 절정을 찍었다. 그때의 나는 앨리스의 자기자극행동에 상당히 관대했다. 앨리스가 아직 어리고 말도 하지 못하니 자기자극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최근의 나는 앨리스의 자기자극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앨리스가 언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한데 자기자극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비자폐인처럼 행동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앨리스가 자기자극행동을 하고 있을 때면 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말을 계속 걸거나, 그래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어깨를 잡고 흔들며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앨리스가 말을 하든 못하든 집에서 자기자극행동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가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나였다. 가장 가까운 양육자인 나조차도 아이의 자폐적 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 누가 이 아이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것도 아닌데 자폐인이 자폐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가 가정에서 하는 자기자극행동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집 밖에서는 신경정형인들을 따라 하느라 평생을 피곤하게 살아야 할 텐데 집에서만이라도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행동을 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이가 자폐임을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고기능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경우 (검사상 수치로만 보자면) 또래와 비슷한 속도로 발달하는 것 같고, 의사소통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없으니 양육자는 자꾸 아이를 비자폐인의 시선으로 보고 꾸짖게 된다. 하지만 자폐의 범주에 있다면 아무리 고기능 자폐라도 신경정형인과는 ‘다르다’. 자폐와 비자폐 중 무엇이 더 좋고 나쁜가의 문제가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도 양육자도 행복해질 수 없다.
앞서 예시로 든 자기자극행동은 자폐인이 가진 수많은 특성 중 단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자폐를 가진 각각의 개인은 수많은 자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가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다면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다름을 인정해야 아이가 가진 수많은 자폐적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위험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소거해야 할 문제점으로 보지 않고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는 아이의 행복한 일생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류가 아니더라도 잘못된 것이 아님을 적어도 양육자가 먼저 인정해 준다면 아이의 인생은 아주 많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