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보통 “거룩한 책”이라는 말부터 떠올립니다.
맞습니다, 거룩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너무 앞서면 성경의 원래 얼굴이 흐려집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이 한 번에 써 내려간 사용설명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때와 자리에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쓴 글들이 한 권으로 묶인 모음입니다.
그래서 읽는 방법도 모양에 맞춰야 합니다.
편지는 편지답게, 시는 시답게, 이야기는 이야기답게, 지혜 말씀은 지혜답게, 예언과 묵시는 상징을 알아차리면서 읽어야 비로소 내용이 또렷해집니다.
같은 문장을 두고도 읽는 방식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지니까요.
예를 들어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종종 등장인물의 행동을 곧장 “따라 해야 할 규칙”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야기의 목적은 해야 할 일을 명령하는 데 있지 않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사실을 들려주는 데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장면이나 솔로몬이 많은 아내를 맞은 기록이 대표적이죠.
그건 모범을 세우라는 신호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고 무엇을 경고하셨는지를 문맥으로 살피라는 초대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성공과 실패, 회복과 심판이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는지 천천히 보아야 오늘 우리 자리에서 바른 교훈을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시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논리로만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와 리듬으로 마음에 들어옵니다.
“반석이신 하나님”, “그늘이 되는 날개” 같은 표현은 그림처럼 우리 안에 장면을 만듭니다.
이런 시어를 딱딱한 규정집처럼 받아들이면 시가 주려는 위로와 탄식, 회개의 떨림을 놓치게 됩니다.
시편 91편의 보호 이미지를 “어떤 위험도 절대 생기지 않는다”는 보증서로 오해하면 현실의 병이나 사고 앞에서 믿음이 필요 이상으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건 시다”라는 걸 기억하고 읽으면 과장과 비유 뒤에 있는 핵심, 곧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고백이 또렷해집니다.
시는 소리와 운율, 반복 같은 장치를 쓰기 때문에 번역으로는 그 맛이 일부 옅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을 살짝 참고하고 속도를 늦춰 소리 내어 읽어 보는 습관이 도움이 됩니다.
박자를 느끼는 순간 시가 전하는 체온이 살아납니다.
서신서는 말 그대로 편지입니다.
바울과 베드로, 요한은 실제 사람과 교회를 떠올리며 글을 썼고 그래서 인사말과 개인적 부탁, 급한 문제에 대한 처방이 자연스레 배어 있습니다.
남의 편지를 읽는다고 생각하고 “누가, 누구에게, 왜”를 먼저 묻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날 선 권면은 고린도 교회가 겪던 실제 갈등과 맞물려 있고, 짧은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둘러싼 사연이 핵심 배경입니다.
이런 맥락을 건너뛰고 오늘의 상황에 억지로 끼워 맞추면 저자의 의도와 어조가 금세 비틀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서 바울이 던진 과격한 표현도 문자 명령이 아니라 율법주의를 겨냥한 격한 풍자라는 걸 알면 문장이 가진 힘이 왜 그렇게 나왔는지 이해가 쉬워집니다.
편지는 결국 대화입니다.
표정과 억양을 상상하며 읽으면 말뜻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지혜문학은 삶을 버티게 하는 짧은 문장들로 가득합니다.
다만 금언은 예언이 아닙니다.
세상을 오래 본 눈이 말해 주는 일반적 경향이지, 한 사람의 복잡한 인생을 100% 보증하는 약속은 아닙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을 절대 공식처럼 붙들면 현실이 다르게 흘러갈 때 불필요한 죄책감과 실망이 생깁니다.
지혜서는 큰 흐름 속에서 균형을 잡으라고 권합니다.
같은 책 안에서도 서로를 보정하며 길을 보여 주는 문장들이 있으니 한 줄만 떼어내어 확대하지 말고 책 전체의 호흡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예언과 묵시는 상징의 언어를 빌려 소망을 들려줍니다.
많은 사람이 예언을 먼 미래의 시간표로만 여기지만 실제로는 당대의 불의와 우상을 꾸짖고 임박한 심판과 회복을 선포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숫자와 색, 짐승의 이미지, 구약에서 빌려온 그림들을 촘촘히 엮습니다.
이런 글을 문학의 상징으로 읽지 않고 암호처럼 풀려하면 곧바로 길을 잃습니다.
먼저 “그때 그들에게” 들린 의미를 확인하고 그 상징이 성경 전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피면 두려움 대신 희망이 보입니다.
고난 받는 공동체가 왜 그런 이미지로 위로를 받았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오늘 우리에게도 담대한 위안이 남습니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가 자연스레 겹칩니다.
우리는 대부분 번역본으로 읽습니다.
원어의 말장난과 운율, 소리의 느낌과 문화적 암시는 다른 언어로 옮길 때 일부 사라지거나 변형됩니다.
좋은 번역일수록 원문의 결을 살리려 애쓰지만 뉘앙스 차이는 남습니다.
그래서 역본마다 같은 구절이 조금씩 다른 표정을 띱니다.
이것을 “틀림”이 아니라 “선택”으로 이해하고 가능하면 두세 역본을 나란히 보면서 주석으로 빈 곳을 메우면 본문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줄어듭니다.
특히 시편 같은 운문은 속도를 늦추고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번역이 놓친 리듬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아가서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번에 보여 주는 좋은 시험대입니다.
본래 젊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아름답고 관능적인 시이며, 전통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비유하는 해석이 함께 걸어왔습니다.
번역 자체가 알레고리로 바뀐 것은 아니고 주석과 설교의 자리에서 상징이 덧입혀져 왔을 뿐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 읽을 때 드러나는 시적 아름다움과 헌신의 윤리, 그 위에 놓이는 신학적 상징은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적 정서와 창조의 선함을 인정하면 비유의 깊이도 자연스레 설득력을 얻습니다.
결국 결론은 간단합니다.
성경은 문학 작품들의 도서관이고, 도서관에서는 책마다 읽는 법이 다릅니다.
모양에 맞춰 읽으면 뜻이 깨끗해지고, 모양을 무시하면 오해가 쉬워집니다.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펼치면 앞뒤를 함께 보고, 시를 만나면 이미지를 마음에 그려 보고, 편지를 읽으면 누가 누구에게 왜 썼는지 먼저 떠올리고, 지혜문을 만나면 예외를 상상해 보며, 묵시를 읽으면 상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성경 전체 속에서 더듬어 보면 됩니다.
이렇게만 읽어도 성경은 “먼 책”이 아니라 “지금 내게 말을 거는 책”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줄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 능력은 ‘책을 제대로 읽는 훈련’에서 자랍니다.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는 집중력, 앞뒤 문맥을 엮어 보는 습관, 비유와 상징을 알아차리는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만 붙들기보다 시와 소설, 에세이, 전기 같은 다양한 문학을 함께 읽는 일이 실제로 큰 도움이 됩니다.
다른 책을 통해 문장의 리듬과 이야기결을 익히면 성경의 문학적 언어도 더 선명하게 들립니다.
넓게 읽을수록 성경은 더 가깝고 더 정확하게 다가옵니다.
결국 성경을 잘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바르게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 길은 책을 제대로 읽는 훈련, 그리고 그 훈련을 돕는 폭넓은 독서 위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부터 한 장씩, 성경과 함께 좋은 문학도 곁에 두고 읽어 보십시오.
내일의 독서가 오늘의 말씀을 더 밝히 비춰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