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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공산주의가 기독교야

by 참지않긔

제목이 무척 과격하고 어그로를 끌고 있죠?


오늘 직원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십일조'라는 단어 자체가 생각이 나지 않는겁니다.

그 절망감이라니.

이제는 두뇌작용의 한계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어 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작은 서글픔을 안고 '십일조'에 관한 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자료와 범위에 사고를 멈춰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크리스찬들이 가져야 할 경제관념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점심시간에 급하게 이 글을 작성해 봅니다.



****



교회가 공산주의를 본능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는 단지 이념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단어가 지닌 역사적 그림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곧바로 구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떠올립니다.

이들 국가는 종종 강력한 국가 통제와 종교에 대한 조직적인 억압을 병행해왔고 그로 인해 기독교 공동체는 오랫동안 공산주의에 대해 자동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선입견이라기보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그 억압적 체제와 상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정치적 독재와는 전혀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경제학적 이상에서 비롯된 용어였고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모든 사람에게 재화를 균등하게 나누자는 급진적 정의의 원칙에서 출발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공유 경제의 이상은 초대교회가 실천했던 삶의 방식과 놀라우리만큼 닮아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그려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은 단순한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물질적 소유의 개념마저 재구성한 하나의 '공동체적 경제 실험'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어지는 4장 32절은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이상적 설명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공동체에 내놓았고 그것이 공동의 필요에 따라 분배되었다는 역사적 실천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그 대금을 사도들 앞에 바쳤고 그 헌신은 곧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는 자발적 헌신이라는 기독교적 영성의 실천이 단지 정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물질의 사용과 재화의 분배라는 구체적 현실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적 경제 원칙’을 이상적인 것으로 실현해 보인 셈입니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의 정치적 공산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구조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유는 공동체의 것이며,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는 정신만큼은 동일합니다.


초기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이레니우스 역시 그러한 흐름을 잇고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십일조라는 제도적 율법 준수로 신앙을 측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적 가르침에 닿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대신, 진정한 신앙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학적 주장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말씀—“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하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이었고 이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윤리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이렇게 자발적 나눔과 공유의 전통을 가졌던 교회가 왜 지금에 와서는 공산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반사적인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이는 바로 그 개념이 오랜 세월 동안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종교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이후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는 경제적 이상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간주하였고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이와 같은 철학적 기반 위에서 발전된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세계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실제 역사 속의 공산정권들—소련, 중국, 북한—은 종교를 체제 위협 요인으로 간주하고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은 교회가 반대한 것은 '공산주의'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강제력과 억압을 수반하며 초월적 가치와 신앙을 부정하는 철학적 구조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독재와 억압, 인권의 침해에 반대해왔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느 체제에서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교회가 거부해야 할 것은 강제적 통제와 억압이지 공동체적 경제 원칙과 나눔의 실천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여전히 경제적 연대와 자발적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가진 정치적 짐을 벗겨낼 수 있다면 우리는 초대교회가 추구했던 삶의 방식과 그들이 실현하려 했던 공동체적 이상이 오히려 그 본래적 의미에서 공산주의의 원칙과 근접하다는 점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가 기독교와 충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단순한 경제 이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 기반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이론은 유물론을 기초로 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세상의 모든 구조는 물질적 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며 종교는 이러한 구조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종교란 계급 억압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위안일 뿐이며 따라서 인간 해방을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런 철학은 종교, 특히 기독교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물질적 결핍이 만들어낸 허상이요, 종교적 구원은 현실의 계급 구조를 은폐하는 마취제에 불과하다는 입장은 초월적 가치와 인간의 영적 갈망을 인정하는 기독교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으로서만 존재할 때에도 그 속에는 기독교와의 불가피한 충돌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이 이념은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정치 권력과 결합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납니다.

소련은 혁명 직후부터 정교회를 강하게 탄압했고 중국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수많은 성당과 교회를 폐쇄하거나 파괴했으며 북한에서는 사실상 종교 자체가 철폐되었습니다.

이들 정권은 종교가 가진 정신적 권위와 공동체적 영향력이 정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그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단지 종교의 본질을 부정하는 철학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공산당이 장악한 체제에서는 단일한 이념과 절대 권력이 유지되어야 했고 종교처럼 초월적 권위를 지닌 사상은 그들과 경쟁하는 또 다른 권위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정치적 구조 바깥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주장하며 양심과 신념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공산주의 정권에게 있어서는 체제의 균열을 유도하는 ‘위험한 요소’였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 국가들은 일관되게 종교를 억압했고 교회는 그러한 체제와 오랜 시간 대립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는 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해 본능적인 경계심을 갖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경계는 단지 과거의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적으로 자유를 억누르고 신앙을 탄압하는 체제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정당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부분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공산주의라는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념이 정치적 독재와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배척해야 할 것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짓밟는 폭력적 권력이지 그 권력이 표방한 ‘공동체적 소유’라는 경제적 이상 그 자체는 아닙니다.


사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 역시 비판해왔습니다.

무분별한 축적과 탐욕, 불평등의 심화, 인간 소외 등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그림자이며 교회는 그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관점은 특정한 체제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체제의 도덕성과 정의를 성경적 가치 기준으로 평가하고 교정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적 공유 원칙'은 그것이 정치적 강제나 이념적 폭력이 아닌 ‘자발적 나눔’이라는 신앙적 실천으로 구현될 수 있다면 여전히 교회 안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사상 논쟁이 아니라 신앙과 실천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물음을 던집니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추구해왔던 ‘공동체적 사랑’과 ‘이웃과의 나눔’은 정치적 공산주의의 구호가 아니라 복음서에서 비롯된 핵심 가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어 하나에 갇혀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경제 모델과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실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강제성’과 ‘자발성’의 차이입니다.

마르크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 사회는 궁극적으로 국가 혹은 공산당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개인의 재산을 국가가 관리하여 평등한 분배를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공동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복음에 대한 응답으로 각자의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 실천은 외부의 강요가 아닌 신앙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헌신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초대교회의 경제적 공동체성은 단지 경제 모델의 한 예가 아니라 신앙과 공동체 윤리의 구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따르기 위해 소유 개념 자체를 재정립했으며 개인의 것이 공동의 필요를 위해 쓰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교회 공동체는 단지 예배의 공간을 넘어서 서로의 삶을 책임지는 구체적인 생명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초기 교부들의 글에서도 확인됩니다.

특히 이레니우스는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계산해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나눔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어떤 규정된 비율의 헌금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는 전면적 삶의 태도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 구성원들은 재산을 포함한 삶 전체를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내어놓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이상은 단지 성경 속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 속에는 이러한 공동체적 나눔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의 재세례파 운동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평화주의를 지향했으며 동시에 초기 기독교의 공동체적 경제 원칙을 따라 모든 소유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공동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의 나눔은 신앙에서 비롯된 자발적 헌신이었기에 오히려 더욱 급진적이고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은 권력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현실이었습니다.

유럽의 기존 교회와 정부는 이들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고 결과적으로 재세례파는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들의 이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에 제도화되거나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청교도 가운데 일부 집단이 시도했던 공동체적 실험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철저한 평등과 공동 사용, 공동 분배를 추구하는 신앙공동체를 지향했지만 마찬가지로 제도적 지속성에는 한계를 가졌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공유 경제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그 시도들은 때로는 단명했지만 신앙의 순수성과 사회경제적 정의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동체의 자발성과 열정은 점차 약화되었고 나눔을 지속하기 위한 내적 헌신은 점점 부담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성과 탐욕은 공동체적 나눔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이러한 죄성이 어떻게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재산의 일부만을 바치고도 전부인 척했습니다.

나눔의 자발성을 가장한 위선은 곧 죽음이라는 대가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부정직함 이상의 문제였습니다.

거짓된 나눔은 공동체 전체의 신뢰와 영적 질서를 흔드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해체’였던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이 이상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그러한 이상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를 알고 있기에 더욱 치열하게 그 가치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자발적 나눔, 공동체적 재화의 공유, 이웃의 고통에 응답하는 책임감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드러내는 가장 실질적인 방식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며 이 이상을 잇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교회는 빈곤과 불의, 환경 파괴, 경제적 불평등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나눔과 정의를 실천하는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본질을 회복해가는 길이며 단지 구조적 체제에 대한 비판을 넘어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한층 더 현실로 다가와야 합니다.

교회가 초대 공동체의 나눔 이상을 그저 과거의 영광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 이상을 살아낼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묻고 답해야 할 시점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지닌 정치적 무게와 이념적 오해를 걷어내고 그 핵심에 놓인 경제적 나눔과 공유라는 본질에 주목한다면 교회는 새롭게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불편함은 대부분 정치적 체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감정을 인식하되 초대교회의 공유 정신을 어떻게 이 시대에 실현 가능한 형태로 구현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는 경제적 정의의 문제를 단지 개인적 자선이나 일시적 구제로 제한하지 않고 보다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사회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가진 효율성과 발전 가능성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 드리운 불평등, 환경 파괴, 과잉 소비, 소외된 이웃의 현실은 분명히 성경적 가치와 충돌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정의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끊임없이 제안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는 ‘사회적 경제’의 다양한 실험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주도하는 주체로 나설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 공동체 경제는 경제적 약자들의 자립을 돕고 공동체 전체가 혜택을 나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노력입니다.

실제로 세계 여러 지역의 교회들은 지역사회 안에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거나 협동조합을 통해 구성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선행의 차원을 넘어 초대교회의 실천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또한 교회는 ‘공정무역’이나 ‘윤리적 소비’와 같은 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소비 행위도 정의로운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많은 성도들에게 낯설 수 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이 일상의 윤리로 확장되는 진정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공정무역은 생산자와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경제 구조를 말하며 윤리적 소비는 인권과 환경, 노동권을 존중하는 기업과 제품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소비를 통한 사랑의 실천이며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인의 일상입니다.


나아가 교회는 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단순한 도움을 넘어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나눔은 한 끼의 급식이나 계절별 구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연속적인 배려여야 하며 결국에는 경제적 자립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 소규모 창업 지원, 마이크로크레딧(소액대출)과 같은 실질적인 도구를 통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설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 자원과 신뢰는 그 어떤 조직보다도 넓고 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나눔이 진정한 공동체 정신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도화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명성과 책임성’입니다.

교회가 자원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를 성도들과 함께 공유해야만 나눔은 공동체 전체의 신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종종 문제시되는 재정의 불투명성이나 특정 리더의 권위적 운영은 바로 이 나눔의 정신을 왜곡시키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재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단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더불어, 오늘날의 경제 정의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자연과 미래 세대와의 관계를 함께 포함해야 합니다.

교회의 경제적 비전이 단지 사람만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정의에 머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전체에 대한 책임과 보전의 사명은 기독교적 경제 윤리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지속 가능한 생태적 경제 모델을 고민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실천을 모색해야 합니다.

친환경 소비, 자원 절약, 재사용, 공동체 텃밭, 생태 신앙 교육 같은 작지만 구체적인 실천들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경제적 정의의 실현은 제도와 구조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 변화와 공동체의 실천이 맞물려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급진적 나눔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특별한 제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공동체에 온전히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개개인이 자기 안의 탐욕과 불안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복음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개인의 변화는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고, 공동체의 구조는 다시 개인의 삶을 이끕니다.

이 선순환이 바로 경제적 정의가 교회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방식이며 복음이 삶의 현실에 닿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입니다.




교회가 ‘공산주의’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이념적 불편함을 넘어서 그 안에 담긴 ‘경제적 나눔’과 ‘공동체적 공유’라는 본질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앙의 가장 현실적인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가 몸으로 살아냈던 바로 그 신앙의 방식이며 복음이 이 땅에서 구현되던 구체적 형태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이론이나 과거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경제적 정의와 나눔의 원리는 고상한 관념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실천 가능한 길이어야 하며 그것은 결국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 질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지금 자신이 놓여 있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기독교 공동체가 물질적 풍요와 소비 중심의 생활방식에 깊이 익숙해져 있는 이 시대에 교회는 과연 탐욕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 조용히 동화되고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종종 번영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물질적 성공을 축복으로 해석하고 재정적 풍요를 신앙의 표지처럼 여기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도 바울 또한 디모데전서 6장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고하며 물질에 대한 집착이 신앙을 갉아먹는 본질적 위협임을 경고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든 소유를 자발적으로 내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어떤 급진적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내면의 자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성령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현대 교회가 다시금 나눔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구성원 개개인이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와 그에 따른 삶의 가치 체계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탁받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삶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경제적 공유가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전환은 단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방향을 바꾸는 회심에 가까운 사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회심을 일으키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단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나눔과 사랑이 구체화되는 장을 열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통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 안에서 물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공동체 안에서 자원의 흐름이 정의롭게 움직이도록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나눔의 실천을 주저하는 이유는 단지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뢰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것을 지키려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나눔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 사이에 사랑과 신뢰가 실질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다시 그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지 프로그램이나 구조를 세우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 안에 살아 있는 관계를 회복하고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경제적 정의를 향한 실천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헌금이나 구제 사역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자산과 공간, 시간과 인력을 통해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교회 건물을 예배 시간 외에 지역사회의 공유 공간으로 개방하거나 소상공인이나 취약 계층을 위한 마을 협동조합 설립, 자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일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자신을 나누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지나치게 성장과 건물, 숫자에 집착하며 가난한 이웃과의 연대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한 나눔을 회복하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본을 따라 산다면 교회에 대한 신뢰는 다시금 살아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명예의 회복이 아니라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단지 경제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적인 구현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음을 증언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제적 정의와 공동체적 나눔을 실천할 때 우리는 단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전히 경쟁과 소유, 축적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을 때 교회는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포하고, 실천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나눔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나눔도 복음에 근거해야 하고, 사랑으로 이뤄져야 하며, 자발성과 기쁨이 깃든 헌신이어야 합니다. 교

회는 그 정신을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다시 한번 이 소명을 붙들고 나눔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는 공동체로 거듭날 시간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시간, 재능, 물질, 공간—을 다시금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지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현실적이고도 영적인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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