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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

by 참지않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도전을 안고 있는 일입니다.

특히,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할 수 있는 국가 정책이나 법률이 등장할 때 교회와 신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요구됩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소수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하려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같은 제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와 평등의 외양을 띠고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훈과 충돌할 소지를 안고 있다고 많은 교회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여러 글에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여러번 밝혔습니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며 성도들은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은 단순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연결된 중대한 물음입니다.


이 글은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성도들의 태도를 바탕으로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취해야 할 네 가지 태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네 가지는 인내, 거룩한 불순종, 섬김, 그리고 사랑입니다.

이 네 가지는 단순히 정답처럼 나열된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삶과 성경 말씀을 토대로 검증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 네 가지를 삶 속에서 살아낸다면 단순히 세상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복음의 향기를 세상 가운데에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선, 성경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 복종은 절대적 복종이 아닙니다.

성경은 동시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고 선언합니다.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시민의식을 형성하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하나님의 정의를 대변하는 한 우리는 기꺼이 복종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충돌할 때에는 우리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히브리 산파들은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두었으며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 앞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다니엘 역시 기도를 금지한 왕의 칙령을 어기고 창문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사도들은 복음 전파를 금하는 권위에 저항하였고 오히려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례는 하나의 진리를 향해 수렴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우선적으로 순종해야 하며 그 순종은 때때로 세상의 법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거룩한 불순종은 단순한 반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양심의 소리에 따른 신앙적 결단이며 진리 앞에서의 정직한 태도입니다.

이 불순종은 질서 있고 품위 있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결코 무질서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권위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꺼이 불이익을 감수하며 조용한 믿음의 자세로 진리를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다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만이 존재합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의 위협 앞에서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공격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감옥에 갇히는 불이익조차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불이익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며 그 감수는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예배가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붙드는 자는 반드시 세상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그 충돌의 지점에서 고난은 불가피한 현실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고난을 단지 피할 수 없는 시련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빚어지는 인내의 영성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믿음의 정금 같은 성숙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고난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향한 길에서 묵묵히 고난을 받아들이셨고 그 고난을 통해 인류를 위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며 세상의 조롱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 복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에서의 손해가 하늘나라에서는 결코 헛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지킨 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심지어는 돌에 맞아 죽고 톱으로 켜이는 고통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고 실패한 자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귀한 이들이었습니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아무리 혹독하고 집요했을지라도 기독교는 오히려 더욱 왕성하게 자라났습니다.

고난이 교회를 억누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한 것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성도들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의 인내는 이방인의 마음을 감동시켜 결국 복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기 직전 로마 당국으로부터 “예수를 부인하고 황제를 주라 고백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주를 섬겼으나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단순한 신념의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쌓아온 신뢰와 사랑에서 우러난 고백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인내로 빛났고 그의 죽음은 복음의 향기를 퍼뜨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인내의 자세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물론, 우리는 로마 시대처럼 공개적인 순교를 강요당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조롱, 사회적 불이익, 신앙을 감추라는 무언의 압력 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때로는 학교에서, 심지어는 친구나 가족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시대착오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택해야 할 태도는 불평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묵묵히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불시험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곧, 고난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참된 믿음의 길을 걷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친히 고난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며 그 인내를 통해 우리를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이며 은혜의 통로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진정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말의 유창함보다도 삶의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인내의 덕을 지키며 진리를 끝까지 붙든다면 세상은 다시금 교회를 향해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고요한 인내는 때로 가장 큰 설교가 될 수 있으며 그 침묵의 순종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외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불순종은 세상의 혁명이나 정치적 저항과는 결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결코 분노에 휩싸인 격정적인 반항이 아니며 권력을 뒤엎으려는 체제 전복의 시도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에서 비롯된 순결한 양심의 반응이며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 올려진 신앙적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에 대하여 악으로 맞서지 않고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조용하고 단호한 거절로 세상의 부당함을 거슬러 서되 그 모든 거절은 품위와 절제로 빛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권력 앞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으셨지만 동시에 검을 들지도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체포를 막기 위하여 칼을 뽑았을 때 주님은 그를 즉시 제지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또한 “내가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하시며 하늘의 능력을 거느리고도 끝까지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나약함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복종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아 불의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되 폭력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2세기 기독교 사상가 오리겐은 로마서 13장의 정부 권위에 대한 순종 문제를 다루며 그리스도인의 참된 저항이란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싸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우리보다 황제를 위해 더 잘 싸울 수 없다. 우리는 황제의 군대에 합류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군대로서 기도의 진지에서 싸운다.”

이 말은 단지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군 복무를 거부하였으며 칼을 드는 일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시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의 나라를 먼저 소속으로 여긴 이들이었습니다.


오리겐의 이와 같은 통찰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 정의를 위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항상 사랑으로 채색되어야 하며 그 의로움은 언제나 겸손으로 감싸져야 합니다.

단지 무엇인가를 반대하기 위해, 혹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서기 위해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불순종은 언제나 고결함을 잃지 않아야 하며 그 안에는 기도하는 마음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4세기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억제하고자 고대 로마 종교의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그 시도는 처참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저 사악한 갈릴리인들은 자기들뿐 아니라 우리 가난한 자들까지 돌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부끄럽도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초대교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의 권위와 맞섰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병든 자를 돌보고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나누었으며 버려진 고아와 과부를 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야말로 세상의 불의에 대한 가장 명확한 반론이었고 가장 강력한 대안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법과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3세기 로마에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가족마저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죽어가는 이들을 곁에서 지켰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감동을 넘어 복음의 실천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같은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법이 복음을 금하고 제도가 신앙을 억누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맞서 싸우는 대신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가 박탈된다면 우리는 더 깊은 사랑으로 세상을 섬겨야 하며 세상의 오해와 편견이 거세질수록 우리는 더 큰 인내와 기도로 대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이 거룩한 불순종의 참된 얼굴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으로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에서 명확하게 주신 명령이며\, 복음의 정신을 가장 온전히 보여주는 본질이기도 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이 말씀은\, 단순한 감정의 절제가 아니라 복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 자체를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친히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조롱하고 침 뱉으며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용서의 선언이 아니라\, 원수조차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온전히 드러난 장면이었습니다.

스데반 또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돌을 던진 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중 하나였던 사울은 후에 사도 바울로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만 가능하며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만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감정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품도록 부름받은 자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악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고자 하는 거룩한 의지의 표현이며 복음의 결정체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법률과 정책이 복음 전파를 억압하려 할 때 우리는 복음을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폭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언어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며 우리의 행동은 공격이 아니라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불이익을 감수하되 그 속에서도 끝까지 상대방을 향한 존중과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비로소 우리 안에서 예수를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복음이 점점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대에 우리는 더욱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담대히 고백하되 그것을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이 둘의 균형을 잃을 때 교회는 진리를 외치면서도 미움의 대상이 될 것이고 혹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진리를 흐리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칼날 같아지고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복음의 두 기둥이며 교회가 세상 앞에서 빛을 발하려면 반드시 동시에 붙들어야 할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고백해야 하며 그 고백은 언제나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섬김은 진리를 버리고 세상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따라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참으로 교회다울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지녀야 하며 동시에 그 진실을 품을 사랑의 가슴을 지녀야 합니다.

진리를 외치는 용기와 사랑을 품는 인내가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비록 그것이 고난과 손해를 동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께서 걸으신 길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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