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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다소년사 리뷰

by 참지않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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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다소년사'를 펼쳤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잇시키 마코토.

그 이름은 이미 '피아노의 숲'으로 내 안에 깊이 남아 있었다.

고요한 건반 위로 스며드는 침묵, 그 속에서 말보다 길게 이어지는 감정.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이 만화는 너무 달랐다.

땟국물 묻은 얼굴, 투박한 농촌 풍경, 귀신이 장난처럼 튀어나오는 이야기.

처음엔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정말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



그러나 몇 장을 더 넘기자 그 낯섦은 금세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선은 거칠었지만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했다.

낯선 얼굴 속에서도 분명히 내가 아는 그 울림이 있었다.

'피아노의 숲'에서 카이가 건반 위에서 대신 말하던 것처럼 이치로는 귀신 앞에서 대신 울어주고 있었다.

같은 사람이 맞았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자리를 두드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다 이치로.

그는 착한 소년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

욕을 하고, 도망치고, 사고를 치는 아이.

하지만 귀신들이 전하지 못한 말을 끝내 듣고, 울고, 때로는 자기 마음을 포기하면서까지 전해준다.

이치로는 귀신을 보는 소년이지만 사실은 죽은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다.

아무도 듣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그 역할을 맡은 아이.



이 만화의 배경은 대략 60~70년대 일본의 어느 시절이다.

울트라맨, 컬러 TV, 핑거5 같은 단서들이 나온다.

한국에선 80년대 분위기로 옮겨왔지만 사실 중요한 건 시대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감정이 머무는 시간, 말하지 못한 말이 흩어지지 못하고 떠도는 순간.

그곳에서 유령이 나오고, 아이가 귀를 기울이고, 독자는 그 둘 사이에서 자기 기억을 본다.



'피아노의 숲'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하나다소년사'는 처음엔 낯설다.

하나는 피아노 건반 위의 긴 연주였고 다른 하나는 매 화마다 닫히는 짧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반복이 어느 순간 이상하게 깊어졌다.

웃기려고 한 장면에서 웃음 대신 울음이 터졌고 가벼운 사건에서 오래 묵은 감정이 솟아올랐다.



이치로는 처음엔 유령을 귀찮아한다.

욕을 하고, 도망치고, 억지로 말만 전한다.

그런데 반복될수록 달라진다.

어느 순간 그는 먼저 다가가고 더 이상 설명을 듣지 않아도 울고 말없이 곁에 서 있다.

그 변화는 성장이라 부를 만큼 크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 현실적이다.

그건 아이가 조금씩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자라는 과정이다.



유령들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

너무 뻔해서 더 진짜 같다.

그래서 독자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 얼굴을 본다.

전하지 못한 고백, 하지 못한 사과, 놓쳐버린 인사.

'하나다소년사'의 유령은 사실 우리 안의 미련 같은 것들이다.



'피아노의 숲'이 음악으로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했다면 '하나다소년사'는 죽음을 통해 그 말을 다시 불러낸다.

그리고 이상하게, 두 작품은 결국 같은 울림에 닿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익숙하면서 낯설다.

이치로는 여전히 욕하고 사고치는 아이지만 결국 귀신의 말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다.

엄마는 날카롭고 무섭지만 병원 복도를 달려가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다른 얼굴임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늘 말이 없고 무거운 존재로 남지만 바로 그 침묵이 시대를 증언한다.

소타는 귀신을 보지 못하지만 형보다 더 정직하게 사람의 눈빛을 읽는다.

그는 유령보다 더 투명한 존재다.



그리고 유령들. 이 만화의 진짜 주인공.

그들은 누구도 아닌 동시에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연은 너무 작고, 너무 평범하고,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아프다.

그들을 이치로가 들어주고 독자가 따라 듣는다.

결국 이 만화는 유령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하나다소년사'는 늘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유령이 나타나고 미처 닫지 못한 감정이 드러나고 이치로가 대신 그것을 전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난다.

그러나 사실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산 자의 마음 속에서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짧은 이야기들이 앨범처럼 이어지고 각 화마다 다른 감정의 파편이 남는다.

'피아노의 숲'이 교향곡 같았다면 '하나다소년사'는 소품집 같다.

그러나 모두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책장을 덮으면 오래전 얼굴이 떠오른다.

연락하지 못한 사람, 사과하지 못한 순간, 끝내 인사조차 하지 못한 관계들.

그 기억이 유령처럼 다가와 내 곁에 선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춘다.

그때 못한 말이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잇시키 마코토는 명언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컷 하나를 남긴다.

그 속에서 독자는 미뤄둔 말을 떠올리고 스스로 묻게 된다.

아직 늦지 않았는지.

'하나다소년사'는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 있는 우리를 바꾸어 놓는다.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피아노의 숲'을 그린 사람이 이런 만화를 그렸다고?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은 알겠다.

다른 건 선과 얼굴뿐이었다.

그 아래엔 같은 감정이 있었다.

음악 대신 유령이, 무대 대신 골목길이, 건반 대신 아이의 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결국 같은 울림.



잇시키 마코토는 ‘슬픔’을 그리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말하지 못한 감정의 무게를 그리는 작가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것.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우리는 늘 같은 경험을 한다.

마음속에서 오래 미뤄둔 한마디가 떠오르는 것.



'하나다소년사'를 다 읽고 난 뒤, 나는 무언가 달라졌다.

특별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일.

연락을 미뤄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마음, 사소한 안부라도 묻고 싶은 충동.

잊힌 줄 알았던 기억이 돌아와 내 마음을 흔든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잇시키 마코토는 단순히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을 불러내는 사람이라고.

어떤 선으로 그리든, 어떤 장치를 쓰든, 그는 늘 같은 일을 한다. 읽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잠자던 감정을 깨우는 일.



그걸 문학이라 불러도 좋고 예술이라 불러도 좋다.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의 만화는 사람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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