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믿음의 새로운 시작
이스라엘로 떠나기 전, 예수님의 생애를 더 깊이 이해하고자 요한복음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첫 구절로 시작되었고, 나에게 강렬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예수님의 사역을 곁에서 직접 목도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날 때부터 맹인인 자를 치유하시는 장면이 오랫동안 마음 깊이 새겨졌다. 그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이유가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여쭈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닌 맹인인 자에게는 물리적 시각과 영적 시각을 동시에 열어 주실 것임을 약속하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이 그 남자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고, 남자는 말씀에 순종하여 연못으로 갔다. 그는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씻었다.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하는 듯 보였다. 눈을 씻고 난 순간 그의 얼굴에 빛이 번지듯 기쁨이 가득해졌다. 단순히 시력을 되찾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목도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에게 있어 실로암은 단순한 연못이 아니라, 구원의 물길이 흐르는 은혜의 장소였다.
여리고의 맹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치유를 구했지만, 실로암의 맹인은 예수님께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셔서 치유를 베푸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아무런 공로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실로암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눈을 뜨고 처음으로 세상의 빛과 하늘을 마주하는 남자의 표정은 순수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 그에게 있어 그 빛은 구름을 뚫고 나타난 영적인 깨달음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는 이제 육체적 시각을 넘어 영적 시각까지도 얻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향해 내미신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증거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라는 사실에 놀라며 수군거렸고, 대제사장들은 그에게 “너는 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확고하게 “그는 선지자이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단순한 치유를 넘어선 깊은 신념과 담대함이 담겨 있었다. 맹인으로 있던 그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진리를 깊이 깨달은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장면은 내 마음에 남아, 요한복음 9장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자”라는 구절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는 육체적 빛뿐만 아니라 영적 빛을 예수님을 통해 경험한 자였고, 그의 증언은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는 산 증거가 되었다.
맹인은 단순히 치유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증언하였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의 이 증언은 베드로의 유명한 증언인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와 같은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오직 진정으로 예수님을 경험하고 거듭난 자만이 그들 앞에서 당당히 서서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다. 맹인의 입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이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율법의 형식만을 지키며 스스로 의롭다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영적 소경으로 드러났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나의 영적 눈도 열려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주님의 증인으로 거듭나고 싶다. 실로암 연못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처럼, 나의 삶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