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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선 Nov 21. 2024

성실한 환자의 가을 일기


걸음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계절이 왔다. 가는 곳마다 바스락 소리가 따라온다. 바스락바스락. 따라오는 소리를 벗 삼아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 들어서면 매번 체크해야 하는 설문지를 준다. 그동안의 여러 신체증상이라던지 세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체크한다. 그날따라 이런 문장이 눈에 띄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실패한 것 같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무엇도 이룬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내 인생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실패한 것 같다고.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정말 그럴까. 단란한 네 식구 도란도란 행복하게 살고 있고, 토끼 같은 아이들을 키우며 우린 얼마나 행복한가. 그럼에도 나는 직업에서의 실패를 이유로 내 인생 전부를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직업이 인생에서 전부는 아닌데 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바이올린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또 졸업을 하고서도. 평생의 내 단짝이 된 바이올린과 참 행복했었다. 바이올린을 직업으로 삼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연주를 하러 다니는 일이 기뻤다. 행복했다. 그렇게 행복했던 일을 육아의 시작으로 그만두게 되었으니 마음의 상처가 상당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내 직업을 포기하고 가슴 아파하고 그리고 무뎌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내 인생은 다른 행복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한 가정을 이루고 육아를 하며 얻는 행복이 이제야 커다랗게 보인다.

양극성장애 치료는 딱 4개월을 채웠다. 그동안 의사와 여러 번의 진료가 있었고, 많은 눈물과 부작용을 지나왔다. 의사는 많이 좋아진 나를 보고 겨울까지 약을 유지하고 천천히 줄여보자고 했다. 이제 치료의 안정기를 지나 끝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참 성실한 환자세요"

의사는 나에게 다른 환자들보다 훨씬 성실하다고 했다. 처방받은 약을 꼬박꼬박 먹고 건강한 생활을 해서 이렇게 빠르게 좋아진 것이라고 말이다. 다 남편 덕이다. 남편은 약을 매일 빼먹지 않고 먹도록 독려하고 지켜봤다. 남편 덕에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좋아진 걸 고맙게 생각한다.


단풍구경 겸 커피를 마시러 남한산성 근처 카페에 다녀왔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 가고 오랜만에 평일휴무를 얻은 고마운 남편과. 카페로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본 산은 울긋불긋하고 남한산성은 신비롭게 멋있었다. 그리고 고소한 커피와 달달한 간식거리. 우리는 오랜만에 여유를 즐겼다. 그렇지. 이런 것도 행복이지. 우리 둘만의 조용한 시간. 아이들 없이 하는 둘만의 이야기들. 흩날리는 나뭇잎들. 바스락거리는 우리의 발걸음. 그리고 멋진 단풍 풍경까지.

이런 시간을 행복의 영양분으로 삼아 마음에 담아둔다. 행복은 이제 가까이 와서 손 위에 올라왔다. 이제 더는 행복을 멀리서 찾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내 가까에 있던 행복. 이젠 보인다. 나와 항상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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