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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Oct 07. 2024

받아치는 여자 받아주는 여자 1

영수와 현숙 : 100일째 만남   

  

토요일 오전 11시. 영수는 마음이 바쁘다. 

만난 지 딱 100일째인 현숙과 만나는 날은 아직도 준비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심장의 빠른 박동은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인지 불편한 긴장 때문인지 아직 정확하게 판단이 안 되는 애매한 감정이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보다 확실히 외출 준비에 시간도 많이 투자하여 즐거워야 할 데이트를 망치지 않도록 한다.     

휴일 외출이니까 복장은 출근복과 확연히 다른 느낌의 편안한 느낌으로 입는다. 

바지는 따뜻한 봄날이니까 흰색 반바지를 입고 푸른 색 라운드 티셔츠로 매치시키고 흰색 운동화를 신는다. 

거울을 보며 전체적으로 점검하니 튀지 않으며 무난한 모습이어서 휴일의 데이트 복장으로는 스스로 만족스럽다. 

3월 중순의 화창한 전형적인 봄날이어서 날씨도 완벽하다. 

이제 그녀와 약속한 영화를 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난 후 시원한 밤공기를 느끼며 산책을 하면 오늘의 휴일 데이트는 아주 즐거운 하루가 되고 그녀와의 관계는 한걸음 더 나아가리라 믿는다.     

오후 1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20분 먼저 도착하여 그녀를 기다리는데, 핫하다고 소문난 카페여서인지 카페 안은 봄날의 데이트 커플들로 가득하여 빈자리가 없다. 

다른 장소로 옮기자고 현숙과 통화해 볼까 하다가 그녀가 꼭 와보고 싶어 한 카페라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어느 테이블이 자리를 비울까 주위를 급하게 살펴보니 음료를 다 마신 커플들이 세 팀 보이는데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이렇게 핫한 카페에 오면 음료를 다 마시고 나면 적당히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얘기는 밖에 나가서도 하면 되는데...” 혼자 속으로 억지를 부려 보지만 사실 영수도 현숙과 영화를 보러가기 두 시간 전에 이곳에서 만나 긴 시간을 보내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여 할 말이 없다. 

“어떡하지?” 고민하는 중에 다행히 창가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난다. 

영수는 얼른 뛰어가 아직 정리도 안 된 테이블에 앉아 좌석을 확보한다. 

화창한 봄 날씨, 그리고 귀한 창가의 테이블 확보로 영수는 기분이 좋아진다. 

정리된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휴일을 즐기며 바쁘게 오고간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시 15분을 지나고 있다. 

처음 소개받는 날에도 그리고 그 후 만날 때마다 15분 정도 늦게 오는 그녀라서 고개를 들어 카페 입구를 보니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다.     

현숙은 핑크컬러의 쉬폰 롱 원피스를 입고 베이지색 하이힐을 신었다. 

운동으로 관리를 열심히 한다는 그녀가 하늘거리는 롱 원피스를 입으니,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게 보여 영수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이미 와서 좋은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손짓한다. 

다소 격한 영수의 동작에 카페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영수는 부끄러운 감정보다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자기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기대한대로 오늘은 정말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다.

현숙은 손을 흔드는 영수를 발견하고는 창가의 테이블로 옅은 미소를 띠고 핑크컬러의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테이블에 앉으며 잔뜩 기분 좋은 영수를 본 현숙은 표정이 그렇게 밝지 않다. 

‘뭐지?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오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침에 전화 통화를 했을 때도 목소리가 밝고 오늘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자고 명랑하게 얘기했었는데. 

그리고 방금 여기 테이블로 걸어올 때도 표정이 좋았었는데...’ 영수는 혼란스럽다.      

“현숙씨! 음료는 뭐 마실래?” 영수는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들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급하게 마실 것부터 챙긴다. 

“화이트 아메리카노.” 현숙은 짧게 대답한다. 

영수가 다시 “아이스? 핫?” 물으니 현숙은 “아이스”라고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투로 대답한다. 

영수는 계속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주문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 화이트 아메리카노 두 잔과 티라미수 한 조각을 시킨다.


진동벨을 받아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현숙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하다. “와~ 여기 정말 핫 플레이스 맞나보다. 사람들 엄청 많이 오네. 창가 자리 구한 거 완전 재수였어.” 하며 영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더 수다스런 목소리로 얘기한다. 

“어. 그래.” 현숙은 여전히 건조하게 단답형이다. 

오늘 데이트를 준비하며 아침부터 신이 났고 왠지 즐거운 시간들만 가득할 것 같았던 예감이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짐을 영수는 직감하며, 심장의 빠른 박동을 느끼는데 이것은 분명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이 아니고 불편한 긴장 때문인 게 확실하다. 

대화가 없어 불편함을 느끼는데 마침 진동벨이 울리자 영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아이스 화이트 아메리카노와 티라미수를 가지러 간다. 

분위기를 바꾸며 얘기를 풀어나가기에는 역시 맛있는 걸 먹으며 얘기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된다. 

“왜, 오는 길에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아침에 통화했을 땐 목소리가 좋더니 지금은 좀 별로인 거 같네.” 영수는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물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고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여 물어본다.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여기로 바로 왔는데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현숙은 안 좋은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만약 올 때까지 별일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나 때문인가?’ 영수는 더욱 조바심이 나고 궁금해진다. 

“그런데 사실 지금 기분이 별로인거 맞잖아.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얘기하고는 살며시 눈치를 살핀다. 

현숙의 표정에서 말과는 다른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러나 영수는 현숙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커피가 맛있네. 이 가게 티라미수도 시그니처 메뉴인데 잘 시켰네.”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현숙이 커피와 케이크를 권하며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말투는 건조하다. 영수는 커피를 마시며 포크로 케이크를 먹는데, 무슨 커피를 마시는지, 케이크 종류가 뭔지 알 수가 없고 생각이 복잡하다. 

영화상영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 이상 남았는데 평소 같으면 짧게 느껴졌을 시간이 지금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영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현숙이 “얼른 커피 마시고 영화 시작할 때까지 백화점 구경하자.”고 한다. 

마침 백화점 내에 있는 극장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영수는 안도한다.      

백화점에 간 현숙은 카페에서 보다 기분이 좋아진 듯하다. 

밝고 화사한 컬러의 봄여름 신상품 옷들을 10벌도 넘게 입어보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영수의 존재는 그녀에게 잠시 잊혀진듯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에서 영화상영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2벌 째쯤 옷을 입어 봤을 때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50분, 마침내 영화상영 시작시간 10분 전이 되었다. 

이제는 영화관 입장이 가능하다. 

현숙은 아직도 입어보고 싶은 옷들이 많이 남았는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극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영화는 오컬트 미스터리 장르인데 생각보다 많이 어둡지 않고 기대한대로 주인공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있다. 

슬쩍 현숙을 보니 영화에 열중하는지 무표정한 것 같아서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수요일 통화하며 무슨 영화를 볼까 현숙에게 물어봤을 때 영수에게 알아서 예약하라고 하여 요즘 상영작 중 관객 동원력이 1등이고 연기력이 인정되는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여 가장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선택한 영화인데 아무래도 기대만큼의 반응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현숙이 카페에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는 뭔지 모르겠지만 기대와 달리 삐걱거리는 상황이 계속 되는 느낌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현숙은 별다른 얘기 없이 화장실 다녀온다며 혼자 성큼성큼 저만치 먼저 걸어간다. 

어디서 기다리라는 얘기도 없이 현숙이 가버려 영수는 여자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복잡한 복도의 기둥에 기대어 기다린다. 

관람객이 많은 영화를 마친 후라서 그런지 여자 화장실은 줄이 길어 보이고 현숙은 금방 나오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니 마침내 현숙이 나온다.         

“영화 재미있었지? 장르가 특별하여 호불호가 있을 거 같아서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재미있더라. 어땠어?” 영수는 조심스럽게 현숙에게 물어본다, “응, 뭐. 나쁘지 않네.” 여전히 대충 대답하는 느낌이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현숙이 오늘은 영수에게 저녁 메뉴와 식당도 직접 정하라고 하여 요즘 가장 평이 좋은 삼겹살집으로 예약을 하였다. 고기도 직원들이 직접 구워주는 집이라서 현숙과 편안하게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가게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후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면 둘 사이가 한 층 더 가까워질 거라고 기대하며 준비한 오늘의 스케줄이다. 예약한 식당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현숙이 묻는다. 

“응, H 돼지고기 집.”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어디서 먹는지 얘기를 안했다. 

“싫어. 영수씨는 지금 내가 이 복장으로 삼겹살집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카페에서부터 꾹꾹 누르던 현숙의 목소리가 마침내 짜증이 난 목소리가 된다. 

영수는 심장의 박동이 더욱 빨라짐을 느낀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인데 영수는 어쩌면 현숙이 카페 테이블에 앉았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 나는 현숙씨가 그런 옷을 입고 나올지 모르고 예약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닌 거 같네. 그럼, 식당은 예약을 취소하면 되니까 어디로 갈까?” 영수는 당황하며 대답한다. 

“몰라, 어디로 갈지 생각 안 해봤어 나는.” 현숙은 표정마저 조금 화가 난듯하다. 

예약한 식당에 안 간다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영수는 플랜B가 없어 얼른 대답을 못한다. 

그런 영수를 보며 현숙은 “생각해 둔데 없으면 떡뽁이 먹으러 가자.”고 한다. 핑크컬러의 쉬폰 롱 원피스를 입고 삼겹살집을 가는 것도 어울리지 않지만, 떡뽁이집도 아니긴 마찬가지 같아서 영수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아니, 떡뽁이도 좋아하지만 오늘은 좀 그렇고 그러면 파스타 먹으로 가자.” 영수는 현숙의 롱 드레스에 그나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음식과 식당들을 급하게 떠올려본다. 

대답 없는 현숙의 표정을 살피며 급하게 맛 집 사이트에 접속하여 가까운 파스타 맛 집을 몇 군데 찾아내어 블로그 반응까지 살펴본 후 후기가 좋은 두 군데를 골라 현숙에게 최종 선택을 물어본다. 

“둘 중 가까운 데로 가자.” 현숙은 블로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거리가 가까운 데로 가자고 한다. 

하긴 평소에 잘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고 멀리 걷기에는 불편할 거라고 영수는 생각한다. 

가기 전에 전화하니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고 전화 예약도 받아준다. 

이제 메뉴와 식당이 정해졌으니 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영수는 분위기상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왜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지만 자꾸만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이 느낀다.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가게는 인테리어와 소품, 액자, 그리고 음악까지 전체적으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티비로 본 미국 서부지역 가게의 느낌이다. 

주문은 태블릿으로 하는데 영수는 하와이안 피자를 고른 후 현숙에게 뭘 먹을지 물어본다. 

현숙은 대답 대신 테블릿 메뉴판을 검색하더니 트러플 버터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한다. 그리고 음료는 생맥주 500cc 두 잔을 시킨다. 

다시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니 잘 생긴 직원이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생맥주를 가져다준다. 

신선해 보이는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와있는 피자와 트러플 향이 진한 파스타가 먹음직하다. 

영수는 몇 시간 동안 계속 긴장하며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배가 더 고프게 느껴져서 얼른 생맥주 잔을 들고 현숙에게 잔을 부딪힐 것을 눈빛으로 권한다. 

시원한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를 먹고 싶다. “건배!”      

“건배? 뭐에 건배?” 현숙이 맥주잔을 부딪히지 않고 살짝 잔을 뒤로 빼며 묻는다. 

“응? 그냥 건배지, 뭐는 뭐...” 영수는 당황스럽다. 

“영수씨.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 우리 만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야. 얘기를 여러 번 했으니 모를 리는 없고, 알아도 영수씨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오늘 종일 그런 거겠지.  내가 왜 평소와 달리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나왔겠어. 기념하고 싶은 날이라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나왔어. 그런데 영수씨는 반바지에 티를 입고 나왔으니 같이 다니는 내 모습이 많이 우스워 보이잖아. 특별한 어떤 옷을 입고 나왔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옷과 어느 정도 매치가 되는 옷으로 입고 나왔어야 하잖아. 반바지 입은 남자 와 핑크컬러 롱 원피스 입은 여자가 같이 다니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막연하던 불안감의 실체가 드디어 고개를 내밀고 나타나고 있다고 영수는 느낀다. 

“나는 현숙씨가 그렇게 입고 나올지 몰랐지. 지난 번 만났을 때도 그렇고  전화 통화할 때도 아무런 얘기가 없었잖아.” 영수는 억울하다. 

미리 얘기를 해줬으면 오늘 현숙의 핑크컬러 롱 원피스에 어울리는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도 입고 나왔을 텐데 주말 데이트에 더욱 어울리겠다고 신경 써서 골라 입고 온 옷차림으로 인해 이렇게 지적받을 줄은 몰랐다. 

“얘기를 안 해서 몰랐다고? 지난 번 만났을 때 다음 번 만나는 오늘이 10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며 오늘은 평소의 만남 보다 좀 특별한 만남이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꼭 드레스코드는 어떻게 하자고 직설적으로 얘기를 해야 하는 거야? 식당도 오늘 같은 날에는 특별히 조금은 격식 있는 장소로 정해야 하는 거 아냐? 100일 기념일에 삼겹살 구워먹으며 소주를 마시고 싶어? 그렇게 평소처럼 할 거면 100일을 기념하는 의미가 뭐야? 그리고 영화도 오늘 같은 날 굳이 오컬트 장르를 선택해야 했어?”      

결과적으로 영수는 100일을 맞아 준비한 현숙과의 데이트에서 옷차림, 영화, 그리고 식당과 메뉴 선택까지 모두 눈치 없고 감각 없이 준비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고 이것이 현숙이 카페에 도착하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심기가 불편한 이유인 것이다. 

“옷차림을 맞추고 싶었으면 만나기로 약속할 때나 아니면 오늘 아침이라도 출발하기 전에 현숙씨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테니 나보고 맞추어 입고 나오라고 얘기했으면 좋았잖아. 또 식당도 영화도 내가 지난번에 오늘 만나면 뭐 먹고 무슨 영화를 볼까 물었을 때 나보고 다 알아서 정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신경 써서 정했는데, 이렇게 싫어할지는 몰랐어.” 

영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한 오늘의 행사가 완전히 망한 것이 억울하여 조금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오늘을 위해 입을 옷도 미리 세탁 맡겼어. 영화와 식당도 내가 하나하나 다 정하는 것보다는 영수씨가 오늘 분위기에 맞게 알아서 잘 선택해줬으면 해서 맡긴 거고. 내가 무슨 큰 파티를 원한 것도 아니고 조금은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했는데 그게 잘못된 거야?” 

현숙이 더 커진 목소리로 빠르게 따지니 영수는 길게 얘기하면 오히려 감정만 더 상하게 될 것 같아서 할 말은 많지만 입을 닫는다. 

영수가 가만히 있으니 현숙도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것 같다.      

“미안해. 너무 큰소리 쳐서. 오늘 100일 기념일을 맞아 행복한 시간 보내며 좋은 추억 만들려 기대했었는데 망친 거 같네.” 현숙이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나도 오늘을 많이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됐네. 이제 피자랑 파스타 먹자. 배고프다.” 영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얘기하며 하와이안 피자 한 조각을 현숙의 접시에 들어주며 먹기를 권한다. 

“조금 식었지만 맛있네. 영수씨도 파스타 같이 먹자.” 하며 현숙도 앞에 놓인 파스타를 테이블 가운데로 옮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어색하다.      

“저녁 바람이 시원하고 좋은데 좀 걸을까?”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영수는 원래의 계획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스케줄인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하려 한다. 

“아냐, 배도 너무 부르고 좀 피곤하네. 그리고 오늘은 신발도 하이힐을 신어서 걷기에 불편하고.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밤 산책은 다음에 하기로 해.” 현숙은 오늘 만남의 시간을 그만하고 싶어 한다. 

“그래? 그럼 아쉽지만 그렇게 하자. 오늘 좀 삐걱거렸지만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영수도 사실 더 이상 시간을 함께 하기보다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느낀다. 

“잘 가. 다음에 봐” 현숙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차를 타러 간다. 

영수는 현숙의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고 왠지 현숙도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둔다. 

영수는 차를 타러 가는 현숙을 뒤로 하고 타야 할 정류장을 지나 걸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오전에 집에서 약속 장소로 여유 있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과 준비가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하나도 제대로 된 선택이 없다. 

옷차림도, 영화도, 식당도. 산책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그러고 보니 현숙과의 만남은 자주 이런 거 같다. 기대와 설렘으로 만났다가 아쉬움으로 헤어지고 한 기억들이 많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요인들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현숙과의 더 좋은 만남을 위하여 무엇을 해결하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고 앞으로 좋은 만남이 될 지도 알 수가 없다. 문제점도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아 벌써 두 정거장을 지나쳐 온 영수의 발걸음이 무겁다.      



상철과 선희 : 100일째 만남     


토요일 오전 11시. 상철은 마음이 바쁘다. 

만난 지 딱 100일째인 선희와 만나는 날은 아직도 준비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항상 느껴지는 심장의 빠른 박동은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이다. 

선희가 특별히 까다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보다는 확실히 외출 준비에 시간도 많이 투자하여 즐거워야 할 데이트를 망치지 않도록 한다.     

휴일 외출이니까 복장은 출근복과 확연히 다른 느낌의 편안한 느낌으로 입는다. 

바지는 따뜻한 봄날이니까 흰색 반바지를 입고 푸른 색 라운드 티셔츠로 매치시키고 흰색 운동화를 신는다. 

거울을 보며 전체적으로 점검하니 튀지 않으며 무난한 모습이어서  휴일의 데이트 복장으로는 스스로 만족스럽다. 

3월 중순의 화창한 전형적인 봄날이어서 날씨도 완벽하다. 

이제 그녀와 약속한 영화를 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난 후 시원한 밤공기를 느끼며 산책을 하면 오늘의 휴일 데이트는 아주 즐거운 하루가 되고 그녀와의 관계는 한걸음 더 나아가리라 믿는다.     

오후 1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20분 먼저 도착하여 그녀를 기다리는데, 핫하다고 소문난 카페여서인지 카페 안은 봄날의 데이트 커플들로 가득하여 빈자리가 없다. 

다른 장소로 옮기자고 선희와 통화해 볼까 하다가 그녀가 꼭 와보고 싶어 한 카페라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보다는 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려 본다. 선희가 도착할 때까지 빈 테이블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녀가 오면 같이 얘기하며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어느 테이블이 자리를 비울까 주위를 급하게 살펴보니 음료를 다 마신 커플들이 세 팀 보이는데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이렇게 핫한 카페에 오면 음료를 다 마시고 나면 적당히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얘기는 밖에 나가서도 하면 되는데...” 혼자 속으로 억지를 부려 보지만 사실 상철도 선희와 영화를 보러가기 두 시간 전에 이곳에서 만나 긴 시간을 보내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여 할 말이 없다. 

“어떡하지?” 고민하는 중에 다행히 창가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난다. 

상철은 얼른 뛰어가 아직 정리도 안 된 테이블에 앉아 좌석을 확보한다.  

화창한 봄 날씨, 그리고 귀한 창가의 테이블 확보로 상철은 기분이 좋아진다. 

정리된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휴일을 즐기며 바쁘게 오고간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 55분이다. 처음 소개받는 날에도 그리고 그 후 만날 때마다 약속 시간을 늦은 적이 없는 그녀라서 고개를 들어 카페 입구를 보니 역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다.     

선희는 핑크컬러의 쉬폰 롱 원피스를 입고 베이지색 하이힐을 신었다. 

운동으로 관리를 열심히 한다는 그녀가 하늘거리는 롱 원피스를 입으니,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게 보여 상철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이미 와서 좋은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손짓한다. 

다소 격한 상철의 동작에 카페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상철은 부끄러운 감정보다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자기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기대한대로 오늘은 정말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다.     

선희는 손을 흔드는 상철을 발견하고는 창가의 테이블로 옅은 미소를 띠고 핑크컬러의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상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온 선희는 상철을 보고는 잠시 당황한듯하더니 이내 표정을 바꿔 웃으며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벌떡 일어나서 손을 크게 흔들면 어떡해?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네.” 하는데 아주 싫은 표정은 아니다. 

선희가 그렇게 얘기하니 상철도 조금 요란을 피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안해. 카페에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랬네. 많이 당황했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아냐, 그 정도는 아니고. 됐어.” 선희가 부드럽게 마무리 한다      

“선희씨! 음료는 뭐 마실래?” 상철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하게 마실 것부터 챙긴다. 

“뭐가 좋을까? 상철씨 이 카페 와본 적 있어? 추천하고 싶은 거 있어?” 

선희가 상철을 바라보며 선한 눈빛으로 묻는다. 

“아니, 나도 이 카페는 처음이야. 특별히 아는 바가 없어.” 상철이 대답하니 “그러면 나는 화이트 아메리카노 먹어볼래.” 선희가 답한다. 

영수가 “아이스? 핫?” 물으니 선희는 “걸어온다고 조금 더우니까 아이스가 좋겠어”라고 대답한다. 

상철은 주문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 화이트 아메리카노 두 잔과 티라미수 한 조각을 시킨다.           

주문을 하고 진동벨을 받아 자리로 돌아오니 선희가 미소로 맞이한다. 

“와~ 여기 정말 핫플레이스 맞나보다. 사람들 엄청 많이 오네. 창가 자리 구한 거 완전 재수였어.” 하며 상철은 자신의 노력을 선희가 알아달라는 듯 평소보다 조금 더 수다스런 목소리로 얘기한다. 

“어. 그래. 이런 날 이런 핫한 카페에서 창가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다니 운이 좋네." 선희도 상철의 장단에 맞춰 목소리의 톤이 조금 올라간다. 

상철은 오늘 데이트를 아침부터 준비하며 신이 났고 왠지 즐거운 시간들만 가득할 것 같았던 예감이 지금 이 시간까지 계속 되고 남은 스케줄도 잘 될 것 같은 기대감에 기분이 좋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진동벨이 울려 상철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를 가지러 간다. 

커피와 달달한 티라미수를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영화 상영 시작까지의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 같다. 

그런데 선희가 대화를 하는 중 딴 생각을 하는 지 평소와 달리 잠깐씩 대화가 중단되며 표정이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듯하다.   

“왜, 오는 길에 무슨 일 있었어? 아침에 통화했을 땐 목소리가 아주 통통 튀더니 지금은 좀 다운된 거 같네.” 상철이 궁금하여 물어본다.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여기로 바로 왔는데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선희는 안 좋은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만약 올 때까지 별일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나 때문인가?’ 상철은 평소와 조금 다른 선희의 분위기에 조바심이 나고 궁금해진다. 

“그런데 선희씨가 카페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잠깐씩 다른 생각에 빠지는 느낌이라서 그러는 거야.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 뭔 일이 있으면 얘기해줘.” 상철은 말과는 다른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선희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나 상철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커피가 맛있네. 이 가게 티라미수도 시그니처 메뉴인데 잘 시켰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던 선희가 커피와 케이크를 권하며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다. 

영수는 커피를 마시며 포크로 케이크를 먹는데, 무슨 커피를 마시는지, 케이크 종류가 뭔지 알 수가 없고 왜 선희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지 이유를 알고 싶어 생각이 복잡하다. 

평소에는 조금 수다스러울 만큼 말이 많고 쾌활하던 선희가 말수를 줄이자 상철도 덩달아 할 말이 없어져 영화상영 시간까지 1시간 이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 

이런 영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선희가 “얼른 커피 마시고 영화 시작할 때까지 백화점 구경하자.”고 한다. 

마침 백화점 내에 있는 극장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상철은 안도한다.      

백화점에 간 선희는 카페에서 보다 기분이 좋아진 듯하다. 

밝고 화사한 컬러의 봄여름 신상품 옷들을 10벌도 넘게 입어보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입어보는 옷들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상철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환하게 웃는 선희는 그동안 보아온 모습이다. 

옷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카페에서 영화상영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는 잘한 결정 같다. 

12벌 째쯤 옷을 입어 봤을 때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50분, 마침내 영화상영 시작시간 10분 전이 되었다. 이제는 영화관 입장이 가능하다. 

선희는 아직도 입어보고 싶은 옷들이 많이 남았는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영화는 오컬트 미스터리 장르인데 생각보다 많이 어둡지 않고 기대한대로 주인공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있다. 

슬쩍 선희를 보니 영화에 열중하는지 무표정한 것 같아서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수요일 통화하며 무슨 영화를 볼까 선희에게 물어봤을 때 상철에게 알아서 예약하라고 하여 요즘 상영작 중 관객 동원력이 일등이고 연기력이 인정되는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여 가장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선택한 영화인데 아무래도 기대만큼의 반응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선희가 카페에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는 뭔지 모르겠지만 기대와 달리 조금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선희는 조금 기다려달라고 하며 화장실로 걸어간다. 

상철은 여자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복잡한 복도의 기둥에 기대어 기다리는데 관람객이 많은 영화를 마친 후라서 그런지 여자 화장실은 줄이 길어 보이고 선희는 금방 나오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니 마침내 선희가 나온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선희가 손을 닦으며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냐, 오래 기다리지 않았고 원래 여자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상철이 두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한다.         

“영화 재미있었지? 장르가 특별하여 호불호가 있을 거 같아서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재미있더라. 어땠어?” 상철은 조심스럽게 선희에게 물어본다, “응, 재미있게 봤어. 이런 장르는 처음이라서 살짝 낯설기는 한데 좋은 첫 경험이었어. 요즘 흥행작답게 관람객이 많네. 사람들이 많이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선희가 기분 좋게 대답을 해준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선희가 오늘은 상철에게 저녁 메뉴와 식당도 직접 정하라고 하여 요즘 가장 평이 좋은 삼겹살집으로 예약을 하였다. 고기도 직원들이 직접 구워주는 집이라서 선희와 편안하게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가게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후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면 둘 사이가 한 층 더 가까워질 거라고 기대하며 준비한 오늘의 스케줄이다. 예약한 식당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선희가 묻는다. 

“응, H돼지고기 집.” 

“아, 요즘 유명한 그 집?” 선희가 순간 당황하는 표정이다.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살짝 웃으며 “나도 그 집 가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오늘은 그 집에 가기에는 내 복장이 조금 불편한데 어쩌지... 그 집은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오늘은 다른 걸 먹어보는 게 어때?” 선희가 상철을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 나는 선희씨가 그런 옷을 입고 나올지 모르고 예약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닌 거 같네. 그럼, 식당은 예약을 취소하면 되니까 어디로 갈까?” 

가리는 음식이 없고 까다롭지 않아 그동안 식당과 메뉴 선택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만났던 선희가 처음으로 상철의 선택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상철은 당황한다. 

예약한 식당에 안 간다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상철은 플랜B가 없어 얼른 대답을 못한다. 

상철이 얼른 답을 하지 못하자 선희는 “파스타 먹으러 가자.”고 먼저 제안한다. 

핑크컬러의 쉬폰 롱 원피스를 입은 날에는 삼겹살집 보다는 역시 파스타집이 좋을 것 같다. 

상철은 급하게 맛 집 사이트에 접속하여 가깝고 분위기도 좋은 파스타 맛 집을 몇 군데 찾아내어 블로그 반응까지 살펴본 후 후기가 좋은 두 군데를 골라 선희에게 최종 선택을 물어본다. 

“둘 다 분위기도 맛평도 좋으니까 가까운 데로 가자.” 

선희는 상철이 추천하는 식당의 블로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더니 둘 다 좋다며 그 중 거리가 가까운 데로 가자고 한다. 

하긴 평소에 잘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었으니 멀리 걷기에는 불편할 거라고 상철은 생각한다. 

가기 전에 가게에 전화하니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고 전화 예약도 받아준다. 이제 메뉴와 식당이 정해졌으니 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상철은 선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안도감을 느끼는데, 그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왜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지만 자꾸만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가게는 인테리어와 소품, 액자, 그리고 음악까지 전체적으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티비로 본 미국 서부지역 가게의 느낌이다. 

주문은 태블릿으로 하는데 상철은 하와이안 피자를 고른 후 선희에게 뭘 먹을지 물어본다. 

선희는 대답 대신 테블릿 메뉴판을 검색하더니 트러플 버터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한다. 그리고 음료는 생맥주 500cc 두 잔을 시킨다. 

잠시 기다리니 잘 생긴 직원이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생맥주를 가져다준다. 신선해 보이는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와있는 피자와 트러플 향이 진한 파스타가 먹음직하다. 

상철은 몇 시간 동안 계속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배가 더 고프게 느껴져서 얼른 생맥주 잔을 들고 선희에게 잔을 부딪힐 것을 눈빛으로 권한다. 

시원한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를 먹고 싶다. “건배!”      

“건배? 뭐에 건배?” 선희가 맥주잔을 부딪히지 않고 살짝 잔을 뒤로 빼며 묻는다. 

“응? 그냥 건배지, 뭐는 뭐...” 상철이 당황스럽다. 

“상철씨. 오늘 우리 만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잖아. 내가 왜 평소와 달리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나왔겠어. 기념하고 싶은 날이라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나왔어. 그러니 건배는 우리 만난 지 100일을 위하여 건배해야지. 나는 기념하고 싶은데 상철씨는 아니야?” 선희가 장난스런 눈빛으로 상철을 보며 묻는다. 

“무슨 얘기야. 당연히 나도 기념하고 축하하고 싶은 날이지.” 상철은 선희가 오늘의 만남에 특별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오늘 처음으로 반바지를 입은 자신과 핑크컬러의 쉬폰 롱 원피스를 입은 선희와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다는 게 보인다. 

“선희씨가 이렇게 꾸미고 나올지 몰랐어. 미리 얘기를 해줬으면 오늘 선희씨의 핑크컬러 롱 원피스에 어울리는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나왔을 텐데 휴일이라서 편하게만 입고 나와서 미안해.” 상철이 자신의 무신경함을 먼저 신고한다. 

“아니야, 상철씨. 지난 번 만났을 때나 오늘 아침에 통화할 때 오늘은 내가 평소와 달리 입고 나갈 거라고 이야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내가 깜빡 잊었어. 그랬으면 상철씨도 옷을 고르기가 편했을 테고 저녁메뉴와 식당도 미리 잘 선정했을 텐데 내가 미안해. 사실 카페에서 처음 상철씨 옷차림 보고 당황하긴 했었어. 하하.” 선희가 많이 부드러워진 얼굴로 얘기해준다.       

‘맙소사. 이런 날 로맨스나 판타지 영화들 놔두고 오컬트 영화를 선택한 건 또 뭔 무신경이야. 정말 나는 오늘이 100일째 만남이라는 걸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거 같네.’ 상철은 이제 깨닫는다. 

100일을 맞아 준비한 선희와의 데이트에서 옷차림, 영화, 그리고 저녁메뉴와 식당 선택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을. 

“내가 오늘 무슨 옷을 입을지, 헤어스타일은 어떻게 할지 등등 나만 챙기는데 신경을 다 썼어. 그래서 영화와 식당도 같이 의논을 하며 정했어야 했는데 내가 여유가 없어서 상철씨에게 전부 맡겼어. 미리 얘기 못한 거 정말 미안해” 선희가 정말 미안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상철은 자기가 세심하지 못했다는 걸 잘 안다.      

“오늘 우리 100일 기념일인데 행복한 시간 보내며 좋은 추억 만들자.” 선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한다. 

“나도 사실 오늘을 많이 기대했었어. 이제 피자랑 파스타 먹자. 배고프다.” 상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얘기하며 하와이안 피자 한 조각을 선희의 접시에 들어주며 먹기를 권한다. 

“자, 이제 건배해야지. 우리의 100일째 만남을 위하여 건배!” 상철이 외치자 선희도 이제는 잔을 들어 같이 건배한다.  

“조금 식었지만 맛있네. 상철씨도 파스타 같이 먹자.” 하며 선희도 앞에 놓인 파스타를 테이블 가운데로 옮긴다. 

서로 웃음 띤 눈빛을 주고받으며 피자와 파스타를 먹으니 다시 지금까지 보아온 선희의 모습이 보여 상철은 마음이 놓인다.       

“저녁 바람이 시원하고 좋은데 좀 걸을까?.” 선희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상철은 계획했던 마지막 스케줄인 산책을 하려 한다. 

“그러자 상철씨. 걷기 딱 좋은 밤 날씨네. 맛있는 저녁을 먹었으니 걸으며 운동도 좀 해줘야지. 좋은 생각이야.” 선희도 밤 날씨가 좋은지 아니면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기꺼이 산책하자고 한다. 

“그런데 하이힐을 신고 왔는데 걸을 수 있겠어?” 상철은 평소에 자주 신고 다니지 않던 선희의 하이힐이 눈에 띠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괜찮아. 등산하는 것도 아니고 산책길 걷는 데는 아무 문제없어.” 선희가 웃으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얘기해준다. 

식당을 나와 화려한 조명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말없이 걸으니 기분 좋은 밤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오늘 우리의 100일째 만남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과는 좀 다르게 진행되어 나한테 좀 화가 나네. 선희씨와의 100일째 만남을 특별히 잘 보내고 싶어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부족했나봐. 그래도 선희씨가 이해하고 받아줘서 좋은 시간 보냈어. 고마워.” 상철은 오늘도 선희의 배려심이 느껴져서 진심으로 고맙다. 

“무슨 얘기야.  나는 오늘 정말 즐거운 시간 보냈어. 상철씨와 100일째 만남을 기념하여 평소에 잘 안 입는 예쁜 옷도 입어보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저녁도 먹고, 또 이렇게 산책도 하고. 하고 싶은 거 다했는걸. 이렇게 다 준비해줘서 고마워.” 선희는 상철은 바라보며 눈빛으로도 고맙다고 얘기하며 살며시 상철의 손을 잡아준다.      

기분 좋게 봄밤을 즐기며 산책을 하다 보니 어느 새 한 시간이 지났다. 

더 오래 같이 걷고 싶은데 하이힐을 신은 선희의 발이 걱정스럽다. 

“이제 그만 걸어야겠다. 아무래도 신발이 불편할거 같아서.” 상철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선희에게 얘기한다. 

“그럴까? 사실 처음엔 괜찮았는데 이제 조금 발이 피곤하긴 하네.” 선희도 힘들었는지 얼른 동의한다. 

더 이상 시간을 함께 하고 싶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느낀다. 

“잘 가. 덕분에 오늘 즐거운 시간 보냈어. 다음에 봐” 선희가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차를 타러 가려한다. 

“오늘은 집에 데려다 줄게. 많이 걸었으니까 택시 타고 가자.” 영수는 돌아서 가는 선희를 붙잡고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다. 

“괜찮아 상철씨. 나만 많이 걸은 것도 아닌데.” 하는 선희의 말을 뒤로 하고 상철은 선희와 함께 택시를 탄다. 

선희의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상철이 선희의 손을 잡으니 선희가 손깍지를 끼며 말한다. “고마워 마지막까지 챙겨줘서.”      

선희의 집 근처에 도착하여 같이 내려서 마지막 인사를 다시 나누고 상철은 돌아서 가는 선희를 바라본다. 

선희는 열 걸음쯤 가더니 뒤를 돌아보고 다시 한번 크게 손을 흔들고 인사하며 이제 상철도 가라고 손짓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선희를 보고나서야 상철은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길을 간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상철은 오늘의 만남을 천천히 생각해 본다. 

오전에 집에서 약속 장소로 여유 있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과 준비가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하나도 기대만큼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선희와 함께한 시간들은 기대만큼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선희와의 만남은 항상 이런 거 같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들이 선희와의 만남에서는 문제로 확대되지 않고 잘 마무리되는 기분 좋은 기억들이 많다. 

이런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벌써 두 정거장을 지나쳐 온 상철의 발걸음이 아직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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