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와 현숙의 100일째 만남
영수와 현숙 : 100일째 만남
토요일 오전 11시. 영수는 마음이 바쁘다.
만난 지 딱 100일째인 현숙과 만나는 날은 아직도 준비에 신경이 쓰인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심장의 빠른 박동은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인지 불편한 긴장 때문인지 아직 정확하게 판단이 안 되는 애매한 감정이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보다 확실히 외출 준비에 시간도 많이 투자하여 즐거워야 할 데이트를 망치지 않도록 한다.
휴일 외출이니까 복장은 출근복과 확연히 다른 느낌의 편안한 느낌으로 입는다.
바지는 따뜻한 봄날이니까 흰색 반바지를 입고 푸른색 라운드 티셔츠로 매치시키고 흰색 운동화를 신는다.
거울을 보며 전체적으로 점검하니 튀지 않으며 무난한 모습이어서 휴일의 데이트 복장으로는 스스로 만족스럽다.
3월 중순의 화창한 전형적인 봄날이어서 날씨도 완벽하다.
이제 그녀와 약속한 영화를 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난 후 시원한 밤공기를 느끼며 산책을 하면 오늘의 휴일 데이트는 아주 즐거운 하루가 되고 그녀와의 관계는 한걸음 더 나아가리라 믿는다.
오후 1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20분 먼저 도착하여 그녀를 기다리는데, 핫하다고 소문난 카페여서인지 카페 안은 봄날의 데이트 커플들로 가득하여 빈자리가 없다.
다른 장소로 옮기자고 현숙과 통화해 볼까 하다가 그녀가 꼭 와보고 싶어 한 카페라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어느 테이블이 자리를 비울까 주위를 급하게 살펴보니 음료를 다 마신 커플들이 세 팀 보이는데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이렇게 핫한 카페에 오면 음료를 다 마시고 나면 적당히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얘기는 밖에 나가서도 하면 되는데...” 혼자 속으로 억지를 부려 보지만 사실 영수도 현숙과 영화를 보러 가기 두 시간 전에 이곳에서 만나 긴 시간을 보내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여 할 말이 없다.
“어떡하지?” 고민하는 중에 다행히 창가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난다.
영수는 얼른 뛰어가 아직 정리도 안 된 테이블에 앉아 좌석을 확보한다.
화창한 봄 날씨, 그리고 귀한 창가의 테이블 확보로 영수는 기분이 좋아진다.
정리된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휴일을 즐기며 바쁘게 오고 간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시 15분을 지나고 있다.
처음 소개받는 날에도 그리고 그 후 만날 때마다 15분 정도 늦게 오는 그녀라서 고개를 들어 카페 입구를 보니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다.
현숙은 핑크컬러의 시폰 롱 원피스를 입고 베이지색 하이힐을 신었다.
운동으로 관리를 열심히 한다는 그녀가 하늘거리는 롱 원피스를 입으니, 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게 보여 영수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이미 와서 좋은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손짓한다.
다소 격한 영수의 동작에 카페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영수는 부끄러운 감정보다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자기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기대한 대로 오늘은 정말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다.
현숙은 손을 흔드는 영수를 발견하고는 창가의 테이블로 옅은 미소를 띠고 핑크컬러의 원피스를 하늘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테이블에 앉으며 잔뜩 기분 좋은 영수를 본 현숙은 표정이 그렇게 밝지 않다.
‘뭐지?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오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아침에 전화 통화를 했을 때도 목소리가 밝고 오늘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자고 명랑하게 얘기했었는데.
그리고 방금 여기 테이블로 걸어올 때도 표정이 좋았었는데...’ 영수는 혼란스럽다.
“현숙 씨! 음료는 뭐 마실래?” 영수는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들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급하게 마실 것부터 챙긴다.
“화이트 아메리카노.” 현숙은 짧게 대답한다.
영수가 다시 “아이스? 핫?” 물으니 현숙은 “아이스”라고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투로 대답한다.
영수는 계속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주문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 화이트 아메리카노 두 잔과 티라미수 한 조각을 시킨다.
진동벨을 받아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현숙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하다. “와~ 여기 정말 핫 플레이스 맞나 보다. 사람들 엄청 많이 오네. 창가 자리 구한 거 완전 재수였어.” 하며 영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더 수다스러운 목소리로 얘기한다.
“어. 그래.” 현숙은 여전히 건조하게 단답형이다.
오늘 데이트를 준비하며 아침부터 신이 났고 왠지 즐거운 시간들만 가득할 것 같았던 예감이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짐을 영수는 직감하며, 심장의 빠른 박동을 느끼는데 이것은 분명 기분 좋은 설렘 때문이 아니고 불편한 긴장 때문인 게 확실하다.
대화가 없어 불편함을 느끼는데 마침 진동벨이 울리자 영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아이스 화이트 아메리카노와 티라미수를 가지러 간다.
분위기를 바꾸며 얘기를 풀어나가기에는 역시 맛있는 걸 먹으며 얘기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된다.
“왜, 오는 길에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아침에 통화했을 땐 목소리가 좋더니 지금은 좀 별로인 거 같네.” 영수는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물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고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여 물어본다.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여기로 바로 왔는데 안 좋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현숙은 안 좋은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만약 올 때까지 별일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나 때문인가?’ 영수는 더욱 조바심이 나고 궁금해진다.
“그런데 사실 지금 기분이 별로인 거 맞잖아.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얘기하고는 살며시 눈치를 살핀다.
현숙의 표정에서 말과는 다른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러나 영수는 현숙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커피가 맛있네. 이 가게 티라미수도 시그니처 메뉴인데 잘 시켰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현숙이 커피와 케이크를 권하며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말투는 건조하다. 영수는 커피를 마시며 포크로 케이크를 먹는데, 무슨 커피를 마시는지, 케이크 종류가 뭔지 알 수가 없고 생각이 복잡하다.
영화상영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 이상 남았는데 평소 같으면 짧게 느껴졌을 시간이 지금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영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현숙이 “얼른 커피 마시고 영화 시작할 때까지 백화점 구경하자.”라고 한다.
마침 백화점 내에 있는 극장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영수는 안도한다.
백화점에 간 현숙은 카페에서 보다 기분이 좋아진 듯하다.
밝고 화사한 컬러의 봄여름 신상품 옷들을 10벌도 넘게 입어보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영수의 존재는 그녀에게 잠시 잊힌듯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에서 영화상영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2벌째쯤 옷을 입어 봤을 때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50분, 마침내 영화상영 시작시간 10분 전이 되었다.
이제는 영화관 입장이 가능하다.
현숙은 아직도 입어보고 싶은 옷들이 많이 남았는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극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영화는 오컬트 미스터리 장르인데 생각보다 많이 어둡지 않고 기대한 대로 주인공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있다.
슬쩍 현숙을 보니 영화에 열중하는지 무표정한 것 같아서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수요일 통화하며 무슨 영화를 볼까 현숙에게 물어봤을 때 영수에게 알아서 예약하라고 하여 요즘 상영작 중 관객 동원력이 1등이고 연기력이 인정되는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여 가장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선택한 영화인데 아무래도 기대만큼의 반응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현숙이 카페에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는 뭔지 모르겠지만 기대와 달리 삐걱거리는 상황이 계속되는 느낌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현숙은 별다른 얘기 없이 화장실 다녀온다며 혼자 성큼성큼 저만치 먼저 걸어간다.
어디서 기다리라는 얘기도 없이 현숙이 가버려 영수는 여자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복잡한 복도의 기둥에 기대어 기다린다.
관람객이 많은 영화를 마친 후라서 그런지 여자 화장실은 줄이 길어 보이고 현숙은 금방 나오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니 마침내 현숙이 나온다.
“영화 재미있었지? 장르가 특별하여 호불호가 있을 거 같아서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재미있더라. 어땠어?” 영수는 조심스럽게 현숙에게 물어본다, “응, 뭐. 나쁘지 않네.” 여전히 대충 대답하는 느낌이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현숙이 오늘은 영수에게 저녁 메뉴와 식당도 직접 정하라고 하여 요즘 가장 평이 좋은 삼겹살집으로 예약을 하였다. 고기도 직원들이 직접 구워주는 집이라서 현숙과 편안하게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가게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후 술 한 잔을 함께 하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면 둘 사이가 한 층 더 가까워질 거라고 기대하며 준비한 오늘의 스케줄이다. 예약한 식당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현숙이 묻는다.
“응, H 돼지고기 집.”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어디서 먹는지 얘기를 안 했다.
“싫어. 영수 씨는 지금 내가 이 복장으로 삼겹살집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카페에서부터 꾹꾹 누르던 현숙의 목소리가 마침내 짜증이 난 목소리가 된다.
영수는 심장의 박동이 더욱 빨라짐을 느낀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인데 영수는 어쩌면 현숙이 카페 테이블에 앉았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 나는 현숙 씨가 그런 옷을 입고 나올지 모르고 예약을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닌 거 같네. 그럼, 식당은 예약을 취소하면 되니까 어디로 갈까?” 영수는 당황하며 대답한다.
“몰라, 어디로 갈지 생각 안 해봤어 나는.” 현숙은 표정마저 조금 화가 난듯하다.
예약한 식당에 안 간다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영수는 플랜 B가 없어 얼른 대답을 못한다.
그런 영수를 보며 현숙은 “생각해 둔데 없으면 떡볶이 먹으러 가자.”라고 한다. 핑크컬러의 시폰 롱 원피스를 입고 삼겹살집을 가는 것도 어울리지 않지만, 떡볶이집도 아니긴 마찬가지 같아서 영수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아니, 떡볶이도 좋아하지만 오늘은 좀 그렇고 그러면 파스타 먹으러 가자.” 영수는 현숙의 롱 드레스에 그나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음식과 식당들을 급하게 떠올려본다.
대답 없는 현숙의 표정을 살피며 급하게 맛 집 사이트에 접속하여 가까운 파스타 맛 집을 몇 군데 찾아내어 블로그 반응까지 살펴본 후 후기가 좋은 두 군데를 골라 현숙에게 최종 선택을 물어본다.
“둘 중 가까운 데로 가자.” 현숙은 블로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거리가 가까운 데로 가자고 한다.
하긴 평소에 잘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고 멀리 걷기에는 불편할 거라고 영수는 생각한다.
가기 전에 전화하니 다행히 빈 테이블이 있고 전화 예약도 받아준다.
이제 메뉴와 식당이 정해졌으니 가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영수는 분위기상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왜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가 없지만 자꾸만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 같이 느낀다.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가게는 인테리어와 소품, 액자, 그리고 음악까지 전체적으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티브이로 본 미국 서부지역 가게의 느낌이다.
주문은 태블릿으로 하는데 영수는 하와이안 피자를 고른 후 현숙에게 뭘 먹을지 물어본다.
현숙은 대답 대신 태블릿 메뉴판을 검색하더니 트러플 버터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한다. 그리고 음료는 생맥주 500cc 두 잔을 시킨다.
다시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니 잘 생긴 직원이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생맥주를 가져다준다.
신선해 보이는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와있는 피자와 트러플 향이 진한 파스타가 먹음직하다.
영수는 몇 시간 동안 계속 긴장하며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배가 더 고프게 느껴져서 얼른 생맥주 잔을 들고 현숙에게 잔을 부딪힐 것을 눈빛으로 권한다.
시원한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주문한 피자와 파스타를 먹고 싶다. “건배!”
“건배? 뭐에 건배?” 현숙이 맥주잔을 부딪히지 않고 살짝 잔을 뒤로 빼며 묻는다.
“응? 그냥 건배지, 뭐는 뭐...” 영수는 당황스럽다.
“영수 씨.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 우리 만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야. 얘기를 여러 번 했으니 모를 리는 없고, 알아도 영수 씨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오늘 종일 그런 거겠지. 내가 왜 평소와 달리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나왔겠어. 기념하고 싶은 날이라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나왔어. 그런데 영수 씨는 반바지에 티를 입고 나왔으니 같이 다니는 내 모습이 많이 우스워 보이잖아. 특별한 어떤 옷을 입고 나왔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옷과 어느 정도 매치가 되는 옷으로 입고 나왔어야 하잖아. 반바지 입은 남자와 핑크컬러 롱 원피스 입은 여자가 같이 다니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막연하던 불안감의 실체가 드디어 고개를 내밀고 나타나고 있다고 영수는 느낀다.
“나는 현숙 씨가 그렇게 입고 나올지 몰랐지. 지난번 만났을 때도 그렇고 전화 통화할 때도 아무런 얘기가 없었잖아.” 영수는 억울하다.
미리 얘기를 해줬으면 오늘 현숙의 핑크컬러 롱 원피스에 어울리는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도 입고 나왔을 텐데 주말 데이트에 더욱 어울리겠다고 신경 써서 골라 입고 온 옷차림으로 인해 이렇게 지적받을 줄은 몰랐다.
“얘기를 안 해서 몰랐다고? 지난번 만났을 때 다음번 만나는 오늘이 10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며 오늘은 평소의 만남 보다 좀 특별한 만남이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꼭 드레스코드는 어떻게 하자고 직설적으로 얘기를 해야 하는 거야? 식당도 오늘 같은 날에는 특별히 조금은 격식 있는 장소로 정해야 하는 거 아냐? 100일 기념일에 삼겹살 구워 먹으며 소주를 마시고 싶어? 그렇게 평소처럼 할 거면 100일을 기념하는 의미가 뭐야? 그리고 영화도 오늘 같은 날 굳이 오컬트 장르를 선택해야 했어?”
결과적으로 영수는 100일을 맞아 준비한 현숙과의 데이트에서 옷차림, 영화, 그리고 식당과 메뉴 선택까지 모두 눈치 없고 감각 없이 준비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고 이것이 현숙이 카페에 도착하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심기가 불편한 이유인 것이다.
“옷차림을 맞추고 싶었으면 만나기로 약속할 때나 아니면 오늘 아침이라도 출발하기 전에 현숙 씨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테니 나보고 맞추어 입고 나오라고 얘기했으면 좋았잖아. 또 식당도 영화도 내가 지난번에 오늘 만나면 뭐 먹고 무슨 영화를 볼까 물었을 때 나보고 다 알아서 정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신경 써서 정했는데, 이렇게 싫어할지는 몰랐어.”
영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한 오늘의 행사가 완전히 망한 것이 억울하여 조금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오늘을 위해 입을 옷도 미리 세탁 맡겼어. 영화와 식당도 내가 하나하나 다 정하는 것보다는 영수 씨가 오늘 분위기에 맞게 알아서 잘 선택해줬으면 해서 맡긴 거고. 내가 무슨 큰 파티를 원한 것도 아니고 조금은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했는데 그게 잘못된 거야?”
현숙이 더 커진 목소리로 빠르게 따지니 영수는 길게 얘기하면 오히려 감정만 더 상하게 될 것 같아서 할 말은 많지만 입을 닫는다.
영수가 가만히 있으니 현숙도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것 같다.
“미안해. 너무 큰소리쳐서. 오늘 100일 기념일을 맞아 행복한 시간 보내며 좋은 추억 만들려 기대했었는데 망친 거 같네.” 현숙이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나도 오늘을 많이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됐네. 이제 피자랑 파스타 먹자. 배고프다.” 영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얘기하며 하와이안 피자 한 조각을 현숙의 접시에 들어주며 먹기를 권한다.
“조금 식었지만 맛있네. 영수 씨도 파스타 같이 먹자.” 하며 현숙도 앞에 놓인 파스타를 테이블 가운데로 옮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어색하다.
“저녁 바람이 시원하고 좋은데 좀 걸을까?”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영수는 원래의 계획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스케줄인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하려 한다.
“아냐, 배도 너무 부르고 좀 피곤하네. 그리고 오늘은 신발도 하이힐을 신어서 걷기에 불편하고.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밤 산책은 다음에 하기로 해.” 현숙은 오늘 만남의 시간을 그만하고 싶어 한다.
“그래? 그럼 아쉽지만 그렇게 하자. 오늘 좀 삐걱거렸지만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영수도 사실 더 이상 시간을 함께 하기보다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느낀다.
“잘 가. 다음에 봐” 현숙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차를 타러 간다.
영수는 현숙의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고 왠지 현숙도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둔다.
영수는 차를 타러 가는 현숙을 뒤로하고 타야 할 정류장을 지나 걸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오전에 집에서 약속 장소로 여유 있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과 준비가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하나도 제대로 된 선택이 없다.
옷차림도, 영화도, 식당도. 산책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그러고 보니 현숙과의 만남은 자주 이런 거 같다. 기대와 설렘으로 만났다가 아쉬움으로 헤어지고 한 기억들이 많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요인들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현숙과의 더 좋은 만남을 위하여 무엇을 해결하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고 앞으로 좋은 만남이 될 지도 알 수가 없다. 문제점도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아 벌써 두 정거장을 지나쳐 온 영수의 발걸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