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나윤 Nov 17. 2024

출국 D-1개월ㅣ오기의 산물 : 합창공연과 자격증 시험

파리로 떠나는 설렘보다 일상을 떠나는 슬픔이 더 크다는 건

출국 D-1개월, 설렘보다 슬픔 


연습실-사무실-스카-코노 무한반복

출국까지 남은 시간 불과 1달, 여전히 3회의 공연자격증 시험남아있었다. 파리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벌여 둔 일들 전부 해치우고 가야만 했다. 1분 1초를 쪼개 살아도 몸 10개 부족한 하루하루가 반복되다. 우선 출근시간부터 야 했다. 야근 대신 조근을 해야 겨우 저녁 시간을 확보 수 있었다. 새벽 일어나서 샤워하 화장하면서 창곡 5개와 밴드 합주곡 5개의 가사를 주문처럼 외웠다. 근이 없는 날은 출근길에 종종 연습실에 들러 8시까지 개인 연습을 고 회사에 곤 했다.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샤워하면서 가사 암기

불행 중 다행이었달까? 벼락치기 일등공신은 왕복 3시간에 달하는 출퇴근길이었다. '환승'이라는 촉박한 데드라인의 연속인 벼락치기만큼 최적화된 이 또 있을까. 기한의 힘을 이용하여 지하철에서 시험공부를, 버스에서 연극 대사 암기, 회사까지 걸어가 뜻도 모르는 독일어 합창곡 가사 암기를 마쳤다.

사실 이미 대학교 때부터 주로 지하철에서 시험공부를 하곤 했었다. 조용한 곳에선 절대 공부가 안 되는 타입.
필기가 난무하는 연극 대본
 다이네 짜~우버 빈덴 비더 바스디 모데 슈트랭 게타일ㅌ! 뜻도 모르고 반복 또 반복한 베토벤 합창곡 독일어 가사

오전에는 정신없이 업무, 점심시간에는 김밥 먹으면서 시험공부, 오후에는 벼락치기 업무 마무리, 퇴근 후에는 연극 연습실, 밴드 합주실, 보컬 레슨실, 스터디카페 등을 전전했다. 중간에 뜨는 시간은 아무 카페나 들어가 저녁으로 빵 쪼가리를 먹으면서 시험공부를 거나, 에 보이는 코인노래방에 들어가서 10분이라도 연습을 했다. 퇴근길에는 다시 길바닥 시험공부를 하고 동네 연습실에 들렀다 집에 도착하면 자정, 전화 프랑스어 수업까지 마치면 비로소 긴 하루가 끝이 났다.

공부시간을 확보하려면 밥 시간을 줄어야 했다. 점심의 8할은 김밥, 저녁의 8할은 카페에서 파는 빵 쪼가리였다.
수치심 유발하는 초고난이도 합주곡 때문에 각종 수업 전후로 10분이라도 코노에 들렀다 귀가했다.
연습실에서 야금야금 시간연장 결제를 하다보면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일상을 남겨 두고 떠난다는 슬픔

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무엇 하나 포기하기 더욱 힘들었다. 내가 빠지면 바로 공석이 되어 버리는 밴드와 극단은 공연까지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고, 나 하나 빠져도 티 안 나는 합창단과  버리고 말면 그만인 자격증 시험은 '무조건 보고 후회'신조 거스를 수  끝까지 오기로 버텼다.

약 2년 동안 매주 수요일 저녁을 보냈던 합주실

그렇게 공사다망한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뜻밖의 실을 깨달다.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보다, 일상을 남겨두고 떠난다는 슬픔이 훨씬 더 크다는 묘한 사실을. 파리에 가면 화요일 밤마다 연습실에서 연기를 할 수도, 수요일 밤마다 합주실에서 노래를 할 수도, 주말마다 댄스홀에서 춤을 출 수도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왔다. 나는 이미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찬 일상을 살고 있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파리에 가고 싶지 않다.

합주를 마친 어느 날의 일기
오늘 밴드 합주를 하면서 아주 오그라들지만 행복이란 걸 느꼈다. 그래, 뭐 별거 있나? 이런 게 행복이지.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하는 것.

내 일상을 두고 파리로 떠나려니 순간순간이 얼마나 아쉬운지. 참 묘하다. 파리로 떠나는 것이 마냥 설레어하는데, 오히려 남겨두고 갈 내 일상의 조각들이 아쉽다. 합주도, 스윙도, 연극도, 합창도, 앞으로 6개월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픈 아이러니한 상황.

나는 그동안 참 행복했었나 보다.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보다, 남겨두고 간다는 슬픔이 더 큰걸 보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오기의 산물 1. 롯데콘서트홀 합창공연


출국 1 전, 아마추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350여 명이 함께 하는 자선 연주회 공연 소프라노로 참여하였다. 서류 심사, 오디션 영상 테스트 면접까지 험난한 선발 과정을 거쳐, 6개월간 소중한 토요일 오전을 치고, 도로 파트 연습에 개인 녹음 숙제까지... 수백 번 중도하차 충동을 렀다.  토요일결혼식 몇 번 갔다 왔더니 출석률 미달로 무대 오를 자격을 박탈당했었다. 래도 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나는 정규 단원에서 탈단한 후 프로젝트성 임시 단원으로 다시 지원서를 넣고 재가입 강행며 마침내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올랐다. 이렇게 끈질기게 집착한 데 나름의 이유 있었다. 대학시절 잠시 몸 담았던 합창단에서 연습 귀찮다고 혼자 공연에서 빠졌던  천추의 한으로 남을 줄이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수년간 아카펠라 모임 등을 전전해봤지만, 결국은 합창 공연을 올려야만 그 갈증 해소될 것 같았다. 더 이상 다음 기회는 없다, 이번에는 끝장을 봐야 한다 외치며 수백 번 마음을 다 잡았다. 과거의 후회와 미련들을 모두 정리해야 파리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주 토요일 오전 합창연습 현장

몇 달 고생 끝에 어렵게 오른 무대 평생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경이로움을 선물해 주었다. 피땀눈물 만든 350개의 악기 선율과 목소리가 한데 모여 라라랜드, 디즈니, 레미제라블의 영화음악으로, 베토벤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특히 객석에서 쏘아 올린 2,000여 개의 플래시 별빛 아래서 관객과 함께 부활의 네버엔딩스토리를 부르던 순간은 마치 우주 한가운데 별무리 속으로 빨려 들어온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황홀함 인생에 다시 없을 새로운 차원의 감동 밀려왔다. 혹시 이런 게 숭고미일까? 결국 이렇게 큰 무대에 올라와 보려고 그 시절 그렇게도 쉽게 공연을 포기했던 걸까? 내가 또다시 이렇게 큰 무대에서, 이렇게 많은 관객들을 만날 일이  있을까?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아서, 끝까지 버텨서 천만다행이었다.

합창 공연을 마친 후 어느 날의 일기
무슨 별나라에서 노래 부르는 줄 알았다. 엄청나게 황홀하고 벅차오르는, 태어나서 맨눈으로 본 것 중에 원탑으로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오기의 산물 2. 200만 원짜리 적성테스트


합창의 감동은 하룻밤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공연 뒤풀이를 마치고 다음 날부터 바로 1주일도 채 남지 않 200만 원짜리 자격증 시험 벼락치기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전 적성테스트 목적으로 등록해 둔 시험이었는데, 나는 시험도 치기 전에 일찍이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10과목에 달하는 방대한 시험범위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인생낭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미리 꾸준히 공부하지 않았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인생에서는 하등 유익하지 않을 지식들이었다. 공부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거액의 시험 응시료를 그냥 버릴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한번 시험장에 들어갔다 나와야 미련 없이 접을 수 있 않겠는가! 이 역시도 파리로 떠나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였다. 나에게 합격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내 길이 아니라는 확인사살이 필요해서 꾸역꾸역 오기로 끝까지 시험을 준비했다.  공부에 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주로 길바닥에서 공부를 하다가, 마지막 1주일은 스터디카페를 전전하며 극강의 벼락치기를 강행했다. 심지어 그때 처음 복습하는 과목들도 있어서 시험 전날에도 밤을 거의 꼴딱 새워 활자들을 단기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집에서 공부를...! 시험 D-4 a.m.6:24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출근 전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같은 날 오후, 합창에서 열창한 대가로 치른 성대 내시경 순서를 기다리면서도 시험 공부를 해야 했다.

출국 3주 전, 시험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도 모자라 당일 아침까지 벼락치기를 하고서, 마침내 짐덩이 같은 시험을 영원히 내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합격 여부를 떠나서 어찌나 감격스럽고 속이 후련하던지!  분야에 인생을 낭비 필요가 없겠다는 명확한 교훈을 얻은, 200만 원의 가치가 충분한 적성테스트였다. 오후 내내 장시간 시험 마치고 머리에 쥐가 난 채로 곧바로 대본을 외우며 연극 연습실로 이동했다. 집에 돌아오니 자정, 그제야 기나긴 하루가 끝이 났다. (이후 파리에서 시험결과를 확인했는데 웬걸? 시험에 합격했다. 이 따위로 공부하고 합격이라니... 급기야 시험의 공신력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역시 나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시험이었다!)

시험 D-day & 연극공연 D-13 p.m.9:41 연극 연습실에서


작가의 이전글 출국 D-2개월ㅣ거창한 예습 : 스쿠버다이빙과 스윙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