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로뎀 카페에서 권사님을 뵈었다.
이웃에 사신다.
"코스모스 잘 있나?"
" 네 잘 지내요 8월에 독립해서 잘 지내고 있어요."
" 독립했구나 잘했다. 생각나제? 코스모스 세 살 때
신평(부산지하철 1호선 종점)까지 간 거?
그때 우리 ㅇㅇ(아들 이름) 이가 울면서
찾아다녔다 아이가?"
"진짜요? ㅇㅇ 이가 울면서 찾아다닌 건 첨 들어요
그 후로도 몇 번 더 집 나갔어요."
"코스모스는 잘 살기라 엄마가 애살(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이나 욕망) 이 많아서,
애한테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다. 그 아이는
자기 길을 똑바로 갈 끼라."
그랬다.
27개월 된 큰딸은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
일요일이었다. 온 교회가 난리가 났다
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집 전화번호가 있었다.
할머니가 집을 지키고 계셨고 집으로
온 전화를 받으시고
사위한테 급하게 전화를 하셨다.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 간 젊은 아빠는 역무원님께 혼이
난 후 울음 범벅된 큰 아이를 찾아왔다'
엄마는 뭐 했냐고?
전혀 몰랐다.
난 그때까지 3교대를 하고 있어서 아침 근무 마치고
4시쯤 교회에 오니까 상황이 막 종료 되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지분이 하나도 없다.
몇 번 더 비슷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날만큼 강도는
세지 않았다.
다만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친구 손을 잡고 재빠르게 사라지는
바람에 아이들이 눈에 띌 때까지 천둥 치는 가슴과 미안함까지 이중고를 겪었다.
고집이 세고 자기표현을 잘 안 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한 번씩 나랑 싸울 때는 눈알을 부라리고 분노만
안으로 삭인채로
일체의 말을 하지 않는 큰 아이로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내 욕심에 너무 늦은 고1 때 악기를 시작했다.
전학을 가게 되었고 지방 예고 기숙사생활이 시작됐다.
시외버스를 타고 한 번씩 큰아이를 보러 갔을 때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대견했다
함께 밥을 먹고 혼자서 버스를 타고 되돌아왔었다.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부족한
큰아이는
점점 힘들어했다.
1년 간의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가까운
여고에 돌아오게 된다.
고3이 된 큰 딸은 학교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했다.
반면 학교에 안 가면 죽는 줄 알던 세대였던 나는
아침에 큰딸을 학교에 골인시키는
사안이 목숨 같았다.
지하철 역사안으로 도망치는 딸을 잡기 위해
높은 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추격전을 펼쳤다.
(나는 달리기가 빨랐다.)
결국 학교에 데리고 가 교실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아이를 소리 지르며 밀어 넣었다.
결국은 내가 졌다.
큰 딸은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갔다.
대학 생활도 순탄하진 않았지만 무사히 졸업했다.
중국어과를 나온 딸은 전공으로 취업이 힘들 거 같다며
초초해했다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니겠다 한다.
반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립하려는 의지가 보였었다.
엄마는 작은 병원에 수간호사를 하고 있고
동생은 지방 국립대 간호학과 재학 중이었다.
같은 길을 가려는 딸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큰아이는 병원을 여러 번 옮겼다
어린 시절 윽박질렀던 나는 보상처럼
큰아이를 지지한다.
올 8월에 독립한 큰아이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코로나 시기부터 저축을 시작한 나는
빌려 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월급날 꼬박꼬박 받고 있다
함께 했을 때 직장 갔다 오면
썰을 풀기 시작한다. 엄마한테 끝도 없이.
"어릴 때 그렇게 좀 하지
다 큰 게 왜 이렇게 할 말이 많냐고?"
한 번씩 호소해도 화장실앞까지
따라와서 말한다.
지금은 3교대를 하는 큰 아이가 어제는
내가 일하는 곳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다.
본인 일하는 곳에서는 휴일이다
하필 바빴다.
뒷정리가 잘 안 되는 아르바이트생
따라다니며 마무리를 짓는 일을 했다.
코스모스는 가녀린 큰 아이를 부르던 호칭이다
독립한 코스모스는 생기 가득하다.
저런 생기를 본 적이 없다.
배신감? 노노!
남자 친구가 생기도록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