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림전>
‘도망 노비의 생존 사기극’이라 소개되는 JTBC드라마 <옥씨부인전>에는 노비 출신 구덕이(임지연 분)가 얼떨결에 양갓집 규수 옥태영이 되어 살아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옥태영이 된 구덕이는 현감의 아들 성윤겸(추영우 분)이 청혼하자 자신이 본디 노비였음을 밝힌다. 그러자 성윤겸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고백하고, 이들은 혼인으로 연대하여 서로의 삶을 지지한다. 조선 배경 사극 버전의 ‘가족의 탄생’(2006년 김태용 감독. 혈연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색한 영화.)이라 하겠다.
19세기 소설 <방한림전>의 방관주는 어릴 적부터 예쁜 옷이나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남자옷 입기를 좋아했다. 그의 부모는 아이 취향을 존중해 딸에게 남자옷을 입히고 집안일 대신 시서(詩書)와 병법(兵法)을 가르치며 애지중지 키운다. 아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부부는 동시에 세상을 떠나고, 이후 방관주는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남장을 유지하며 본격적인 입신출세의 남성적 삶을 산다. 12세의 이른 나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자 그 돋보이는 재능을 알아본 천자가 방관주를 총애하고 곧 한림학사에 임명된다. 방관주의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스펙이 알려지면서는 명문가의 구혼이 구름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혼인은 거칠 것 없는 방관주 인생에 난관일 수밖에 없었다.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혼인은 인생행로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륜지대사인바, 생물학적 여성이면서 남성의 삶을 사는 방관주에게는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유일하게 방관주가 여성임을 알고 있던 유모가 끊임없이 남장을 그만두라 조언한 것도 이런 문제들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영혜빙을 만나면서 해결된다. 영혜빙은 병부상서 영공의 막내딸로, 방관주를 눈여겨본 영공이 그를 막내딸 사위로 삼고자 정성껏 구혼한다. 방관주는 공직에 오른 남자로서 처자식을 두지 않으면 이상히 여겨질 것이고, 혼인을 하자면 상대를 속이는 일이 될 것이기에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때문에 영공의 간곡한 구혼에도 자신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며 사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공은 방관주를 집으로 초대해 영혜빙을 만나게 한다.
방관주와 영혜빙, 두 사람은 한눈에 서로가 인연임을 알아본다. 방관주는 아름답고 꾸밈없이 재기 넘치는 영혜빙의 모습에 감탄하고, 혜안을 가진 영혜빙은 방관주가 남장여자임을 꿰뚫어 본다. 방관주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역할이 다른 자신의 상황 때문에 혼인을 망설였다면, 영혜빙은 평소, 여성을 남편에게 종속시키는 가부장적 혼인 제도에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여자는 죄인이다. 온갖 일에 이미 마음대로 못하여 남의 규제를 받으니 남자가 못 된다면 혼인 관계를 끊는 것이 옳다.”
<방한림전>
이렇듯 영혜빙은 혼인할 뜻이 없던 차에 아버지가 선보이는 사윗감이 남장여자임을 알아채고 다음과 같이 생각을 바꾸게 된다.
‘(…) 내가 보니 방씨의 얼굴이 시원스럽고 행동거지가 단엄하여 일대의 기남자(奇男子)다. 이런 영웅 같은 여자를 만나 일생 지기(知己)가 되어 부부의 의리와 형제의 정을 맺어 한평생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내 본디 남자의 사랑하는 아내가 되어 그의 절제를 받으며 눈썹을 그려 아첨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있었다. 부부간 금슬지락을 내가 원하지 않더니 우연히 이런 일이 있구나. 어찌 우연하다 하리오? 반드시 하늘이 생각해 주신 것이다. 남편의 수건과 빗을 받들어 시중드는 구구한 일보다 이것이 낫지 않으리오?’
<방한림전>
이에 방관주와 영혜빙은 서로를 반겨 혼인하고 비밀을 공유하며 지기로서 다정하고 평화로운 혼인 생활을 영위한다. 그리고 수년이 흘러 아들도 얻게 된다.
아들을 얻게 된 계기 역시 범상치 않았다. 혼인 후 방관주는 변방 안찰사로 파견되는데, 관사 근처 절경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어느 날, 천둥소리가 진동하며 큰 별이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별이 떨어진 곳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퍼지더니 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슴에 ‘낙성’이라 쓰인 아기가 놓여 있었다. 방관주는 하늘이 내려준 아이라 생각하며 데려와 영혜빙과 함께 낙성을 귀하게 키운다. 그렇게 그들은 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화목하고 완벽한 일가를 이룬다.
여성영웅소설로 분류되는 <방한림전>은 독특한 설정과 진전된 사유로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다수의 여성영웅소설에서, 문무를 겸비한 여성인물은 남장으로 전쟁에 나가 영웅적 활약을 펼치다가도 혼인 시기에 이르면 자의나 타의에 의해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혼인하고 위계적 부부 관계에 귀속된다. 그런데 <방한림전>의 인물들은 평생 자신들의 방식대로 존재한다. 동성혼을 함으로써 방관주는 남성으로 살며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업적을 한껏 성취하고, 영혜빙은 가정 내의 여성적 삶을 평등하고 주체적으로 영위한다. 방관주와 영혜빙이 각자 원하는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두 인물 모두 유교적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성역할에 반기를 들고 연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지향과 욕망에 걸맞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평화롭게 창조해 냈다.
나아가 <방한림전>은 성소수자 이슈가 다뤄진 작품으로 읽히기도 한다. 오늘날의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이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전통시대 서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상력이 더해질 수 있다. 방관주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전생에 남자였다는 설정을 갖는다. 전생에 그는 천상의 문곡성이었으나 부인 항아성(영혜빙)과 금슬이 너무 좋아 맡은 바를 소홀히 한 탓에 벌을 받고 지상 여자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방한림전>의 이본인 <쌍완기봉>에는 영혜빙에게 반한 방관주가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이로써 보면 방관주가 단지 공적 활동을 하고자 남장을 한 것만은 아니라 해석될 여지가 있다.
영혜빙 캐릭터 또한 의미가 깊다. 여성영웅소설에서 전통사회 성차별에 대한 문제는 대개, 남장으로 남성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고정된 성역할과 차별적 성적 지위의 경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여성영웅의 활약에 의해 조명된다. 그런데 영혜빙은 당대의 여성적 역할과 여성적 가치를 고수하면서도 혼인 관계 내의 불평등과 부자유를 거부한 인물이다. 직관력과 공감 능력을 발휘하고 배려와 헌신의 미덕을 구현하며 충실한 아내, 훌륭한 어머니로 살아갔다. 방관주가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고 아내의 역할을 무시하는 여느 가부장의 모습을 보일라치면, 너와 나의 다르지 않음을 꼬집으며 평등한 부부 관계에 대한 지향과 내조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칫 폄하되기 쉬운 여성적 삶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정상가족’의 관념을 회의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어느 사회나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가족의 형태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일 수는 없다.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서로 다른 개인이므로 그 개인이 구성하는 가족의 형태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문의 혈통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방관주와 영혜빙은 동성혼을 하였고 아이를 입양해 애지중지 키웠다. 서로를 마음 다해 사랑하고 그 행보를 힘껏 지지하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가족이 되었다. 가히 조선판 ‘가족의 탄생’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참고자료
장시광, 『조선시대 동성혼 이야기: 방한림전』, 한국학술정보, 2006
박혜숙, 「여성영웅소설과 평등, 차이, 정체성의 문제」, 『민족문학사연구』 31, 민족문학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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