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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임 Oct 26. 2024

딸 팔아먹은 아비, 부모화된 아이(1)

<심청전>, 심청 부녀 이야기

‘딸 팔아먹은 아비’     


심학규는 눈먼 자이다. 눈이 먼 그는 딸자식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해 어린아이에게 생계를 책임지게 하고, 눈 뜰 수 있다는 희망에 덜컥 시주 약속을 하여 아이의 목숨을 바치게 했다. 무능하다 못해 그 자신의 말마따나 “딸 팔아먹은 아비”로, 그가 “눈이 멀었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시각 정보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심학규는 무기력한 가장, 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권위를 형성하지 못하는 가장이면서도 주변의 도움, 희생으로 그 지위가 존속, 회복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심청전>은 효이념을 강조하며 가족 내 불균형한 관계를 고착화하고 불평등한 의무를 배분하는 데 기여한 서사로(서경희, 2014)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심학규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오랜 축원 끝에 어렵게 얻은 늦둥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섭섭해하는 곽씨부인과 달리 심봉사는 그저 기뻐한다. 우리 딸이 여느 아들 못지않을 거라며 실망한 아내를 위로하고, 기쁨과 사랑의 말로 아기를 어른다.           


물론 여느 부모들처럼 심봉사가 딸에게 한결같이 자애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부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 봉착하자 죄 없는 갓난아기에게 화증을 내기도 한다. 

         

“아이고 마누라 날 버리고 어데 갔소. 혈혈단신 이내 몸이 누구에게 의탁을 허란 말이요.” 이렇게 앉아 울음을 울 제 불쌍한 심청이는 배가 고파 울음을 운다. 심봉사 기가 막혀 우는 아이를 안고 앉어, “아가, 끌끌끌 우지 마라. 내 새끼야, 너도 너의 모친이 죽은 줄을 알고 우느냐, 배가 고파 울음을 우느냐? 너의 모친은 먼 데 갔다. 낙양동촌 이화정의 숙낭자를 보러 갔다. 죽상지루 오신 혼백 이비부인을 보러 갔다. 가는 날은 있다마는 오만 기약은 없었구나. 아가 아가, 우지 마라.” 아무리 달래여도 아이는 그저 응아응아, 심봉사 화가 나서 안았던 아이를 방바닥에다 미락 치며, “죽어라, 죽어라, 썩 죽어라, 이놈의 새끼야! 썩 죽어라! 네 팔자가 얼마나 좋으면 초칠일 안에 어미를 잡아먹고 이 고생이여. 죽어!” 아이는 질색허여 그저 응아, 응아, 응아.
심봉사가 참설움이 터져 나오는듸, “아가, 끌끌끌끌끌 우지 마라. 내 새끼야. 너 죽어도 내 못살고, 나 죽어도 너 못 살리라. 네 울음 한마디면 일촌간장이 다 녹는다. 불쌍헌 내 자식아 우지 마라. 어서어서 날이 새면 젖을 얻어 먹여주마. 제발 덕분에 우지를 마라.”
그날 밤을 새노라니 어둔 눈은 더욱 침침허고 아해는 점점 기진헐 제 동방이 히번히 밝아오니 우물가에 물 긷는 소리가 들리거늘, 심봉사가 좋아라고, “옳지 인제 날 밝었구나.”
                                                                                                   <김연수 창본 심청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오랜 기간 의지했던 부인을 묻고 집으로 돌아온 뒤, 사랑하던 의지처를 잃은 상실감, 홀로 남겨진 막막함이 뒤섞여 그야말로 미친 듯이 실성통곡하는 심학규 앞에 끊임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배가 고파 우는 아이를 달래 보지만 도무지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벌컥 화를 내며 아이를 내치고, 어미 잡아먹어 이 고생이냐며 죽어버리라 구박한다.     

      

아기에게 화를 전가하는 심학규의 행위는 폭력적이고 비속하다. 그 행위 자체가 옹호될 순 없지만, 불우한 상황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우며,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보통의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화를 옮기곤 하는가? 가진 것 없는 눈먼 아비로서 당장 내 아이의 배고픔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라도, 아니 자신을 포함한 온 세상에 화가 치미는 절망적 심정이 사실적으로 표출된 장면이기도 하다.     


성내는 모습에 더 큰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보자 곧 아이를 다시 끌어안는다. 비로소 “참설움”이 터져 나와 “불쌍헌 내 자식아, 우지 마라.” 달래고, 우는 아이와 같이 우는 마음으로 긴긴밤을 보내고서는, 날 밝아 물 긷는 소리가 들리자 “좋아라고 ‘옳지 인제 날 밝었구나.’”하며 젖동냥에 나선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포기되지 않는 딸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심봉사는 숭고하고 점잖은 사람이 아니다. 완판본 <심청전>에는 “양반의 후예 행실이 청렴하고 지조가 강개하니 사람마다 군자라 칭하”는 인물이라 소개되지만, 그 구체적 형상은 점잖은 도덕군자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하층의 비속한 현실을 살아가는 범부(凡夫)에 가깝다. 양반의 후예라지만 이미 몰락하여 사회적 지위나 가산을 잃은 지 오래고, 더욱이 장애가 있어 홀로 생계를 꾸리기 힘든 상황에서 그는 점잔을 빼며 위신을 세워 체면치레하지 않는다. 낮은 자세로 마을 아낙들에게 연민을 호소하며 살뜰히 심청을 키워낸다. 형편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하며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청에게도 권위적인 아버지, 딸에게 효의 당위를 가르치는 가장이 아니다. 무능해서 미안하고, 무능한 자신의 딸이 가없이 애처로운 다감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7~8세의 어린 심청이 아버지를 봉양하겠다며 홀로 동냥에 나설 때는 손사래 치며 말리고, 추운 날에도 나가는 딸의 모습에 탄식하다가 돌아오는 기척에는 “문을 펄쩍 열고 두 손 덥석 잡고, ‘손 시렵지야?’ 입에 대어 훌훌 불며 발도 차다 어루만지며, 혀를 끌끌 차 눈물” 짓는다. “널로 하여곰 밥을 빌어먹고 살잔 말가? 애고애고 모진 목숨 구차히 살아서 자식 고생시키난고.” 하는 말에는 못난 아비로서의 자책감이 가득하다. 심청이 그토록 아버지를 사랑하는 어진 아이로 성장한 데에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곡진한 사랑이 선재해 있었다.

          

그런 그가 뒤늦게야 자신이 한 시주 약속 때문에 심청이 팔려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말이냐, 참말이냐? 애고애고, 이게 웬 말인고? 못 가리라, 못 가리라! 네 날다려 묻지도 않고 네 임의로 하단 말가? 네가 살고 내가 눈 뜨면 그난 응당 하려니와, 자식 죽여 눈을 뜬들 그게 차마 할 일이냐? (…), 이 말이 무슨 말인고? 마라, 마라! 못 하리라! 아내 죽고 자식 잃고 내 살아서 무엇하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자. 눈을 팔아 너를 사지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엇을 보고 눈을 뜨리? 어떤 놈의 팔자관데 사궁지수(四窮之首) 된단 말가? 네 이놈 상놈들아! 장사도 좋거니와 사람 사다 죽여 제(祭)하는 데 어디서 보았느냐? 하날님의 어지심과 귀신의 밝은 마음 앙화가 없겠느냐? 눈먼 놈의 무남독녀 철모르는 어린아이 날 모르게 유인하여 값을 주고 산단 말가? 돈도 싫고 쌀도 싫다! 네 이놈 상놈들아! 옛글을 모르느냐? (…) 여보시오 동네 사람! 저런 놈들을 그저 두고 보오?”
                                                                                                   <완판 71 장본 심청전>  

심청의 매신(賣身)은 효행이라는 미명하에 뱃사람에게도, 이웃에게도 연민되고 칭송되지만 사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심봉사의 말처럼, “눈먼 놈의 무남독녀 철모르는 어린아이 날 모르게 유인하여 값을 주고 산” 일이며, “동네 사람, 저런 놈들을 그저 두고” 보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자식 죽여 눈을 뜬들 그것은 차마 할 일이 아니며, 눈을 팔아 딸을 사지 딸을 팔아 눈을 뜰 일이 아닌 것이다.      


이미 계약이 끝나고 심청이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 심봉사의 울부짖음은 더없이 무력할 뿐이지만, 사실 그의 반응이,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지나친 책임감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그럴 일이 아닌 일에 소중한 목숨을 내놓았다는 것이, 심청의 효행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도 현실적인 인식일 것이다.       

    

심학규는 딸을 팔아먹고도 눈을 뜨지 못한다. 심봉사 말처럼 딸을 팔아 눈을 뜨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어서인지, 심봉사의 분노와 회한 탓인지 공양미 300석을 바쳤어도 부처의 영험함은 발휘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눈이 먼 상태로 살아가야 했으며, 뺑덕어미와 속적 쾌락을 즐기기도 하지만 딸 팔아먹은 아비라는 비탄을 떨치지 못한다.(훗날 맹인잔치에 참석하여 “눈도 뜨지 못하고 자식만 잃었사오니 자식 팔아먹은 놈 이 세상에 살아 쓸데없사오니 죽여주옵소서.”라고 말하는 등, 딸 팔아먹은 아비라는 심학규의 죄책감은 여러 이본에서 표현된다.) 철모르는 딸이 의논도 없이 매신한 것은 결국 자신의 장애와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신이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일어난 비극이란 점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심청전>을 가르치다 보면 심학규에 대해 무능하며 이기적인 부모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듣곤 한다. 사실 어릴 적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심지어 그런 부모를 평생 봉양해야 하는 삶을 심청은 그만두고 싶었을 것이고, 그러니 장승상 부인이 쌀값을 대신 지불하겠다는 제안도 거절한 채 인당수로 뛰어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어린 딸의 생계 활동으로 간신히 먹고사는 형편에 쌀 300석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물을 약속한 것은 오늘날의 독자뿐 아니라 심학규 자신도, 당대 향유자들도 비난할 일인 것이다.(시주 약속 후 심학규는 곧 후회와 자책에 괴로워하고, <심청전> 가운데는 나쁜 아버지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시주 약속을 심학규가 아니라 심청이 직접 한 것으로 설정된 이본도 있다.)       

그는 효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의 희생을 권장하는, 조선후기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당대 지배이념의 수혜자 남성/가장이라는 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심학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선 하층의 범속한 아비로, 가족을 살뜰하게 사랑하며 딸아이 돌보는 데 나름의 노력을 다한 인물이기도 하다. 홀로 동냥하겠다는 어린 딸의 청을 수락해 버리고 물색없이 시주 약속을 한 것은 물론 비난의 소지가 있으나, 그 일들이 딸의 매신과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라 감히 생각이나 했겠는가? 특히 그의 시주 약속은 이해불가능한, 나쁘고 악한 행위라기보다 차라리 누구나 한번쯤 그럴 수 있는 인간적 결함에 가깝지 않을까?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혼자 기다리던 심학규, 밤 늦도록 돌아 오지 않는 어린 딸,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불길한 생각들, 기다리다 못해 마중 나가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승려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조되었다는 일련의 상황들은, 사리분별 없이 시주 약속을 한 그 충동적 행위를 꾸짖을 수만은 없게 한다. 그때 그에게 눈을 뜰 수 있다는 말보다 절실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그같은 절박한 심리를 이용해 오기까지 발동시키는 승려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그리 많겠는가?(정출헌, 1999) 순간의 충동이 심청의 투신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과정을 제어하고 조정할 만한 장치들이 심청 부녀에게는 부재했고, 그것은 일상의 위기들이 작은 상태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큰 위기로 전화(轉化)해 버리기 십상인 사회·경제·문화적 환경, 그 부녀가 처한 환경의 취약성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부모 역할은 진공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자원이 없다면 충분히 좋은 부모가 나올 수도 없다. 안정된 가정에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것들이 취약한 환경에서는 엄청난 위기로 전화하여 가정 전체를 위협하는 사례가 오늘날에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조선 하층이 겪었을 법한, 심청 부녀의 비극이 비단 못난 아비 탓이라 비난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김진영 외, 『심청전 전집』 1,3권, 박이정, 1997

고은임, 「부녀관계를 중심으로 읽는 <심청전>」, 『판소리연구』 50, 판소리학회, 2020

서경희, 「심청전에 나타난 가장의 표상과 역설적 실체」, 『동방학』 30,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2014

정출헌, 「심청전의 민중정서와 그 형상화 방식」, 『심청전 연구』, 태학사, 1999

마리오 마론, 이민희 역, 『애착이론과 심리치료』, 시그마프레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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