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한반도의 아픔은 만주로 흘러들었고 안중근이라는 이름은 독립의 상징으로 새겨졌다. 영화 <하얼빈>은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와 함께, 인간의 고뇌와 시대의 상처를 생생히 펼쳐 보인다. 우민호 감독은 주인공들이 마주했던 냉혹한 현실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영화는 영웅 서사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억압받은 자들의 울부짖음을 대변한다. 얼음처럼 차가운 만주의 대지는 자유를 갈망하던 영혼들의 흔적을 새기며 관객을 역사로 끌어들인다.
안중근 역을 맡은 현빈은 인간적 내면을 차분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는 사령관의 결단력과 한 인간의 흔들리는 마음 사이를 오가며 관객에게 감정적 공감을 선사한다.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라는 대사는 그의 결의를 일회적 행동으로 축소시키지 않고, 그가 떠안은 저항을 함축한다. 사령관의 임무와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자신의 실수가 남긴 통한의 상처에서 그가 느끼는 복합적 감정이 스크린에 투영된다.
만주의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은 이야기의 주체다. 얼음이 뒤덮인 강은 고독한 결심의 길을 상징하고, 눈 속에서 피어나는 붉은 피는 자유를 향한 열망이자 절규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그와 동지들의 침묵보다 무거운 결의와 전투 직전의 숨 막히는 긴장감은 겨울의 정적을 유영한다. 이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심정과 현실을 체감하도록 돕는다.
영화 <하얼빈> 스틸 컷-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영화는 비주얼에서 시대 고증과 예술적 감각이 어우러진 걸작이다. 러시아 건축의 웅장함과 만주 특유의 황량함이 스크린 속에서 대비되며 생생한 숨결로 지펴진다. 흑백의 플래시백은 안중근의 기억을 추적하는 장면에서 서늘한 감정을 돋운다. 관객에게 시간의 무게와 순간의 강렬함을 전달한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미적 즐거움을 넘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공감적 성찰을 던진다.
<하얼빈>은 영웅을 기리기 위해서나 한 인물에게 집중되는, 그렇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가 마주한 인간적 갈등과 주변 동지들의 다층적 관계와 동요를 아울러 조명한다. 조우진과 박정민이 연기한 김상현과 우덕순은 독립운동가들이 지녔을 법한 심리적 갈등, 서로를 향한 믿음, 그러나 항상 도사리고 있는 불신과 의심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적 약점을 지닌 채, 두려움 속에서도 전진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 진폭을 더하는 생동감이다.
영화는 암살의 실행보다 그 준비 과정, 발각되고 쫓기고 숨지며 조직이 침몰 직전까지 내몰리는 연출에 집중했다. 이런 과정이 더해지면서 긴장감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킨다. 동지 중 누군가는 배신자가 아닐까, 의심의 끈은 지속되며, 심리적 스릴러의 드라마는 관객에게 감정의 긴장도를 더해준다. 그러나 밀정 서사의 복잡성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밀도를 높였다면 재미를 더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서사가 전하는 현재의 가르침
<하얼빈>은 과거를 회고하면서도 현재의 비상계엄 국면과 연결되는 교훈을 제시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라며 백성들의 저력을 두려워한다. 영화는 부패한 권력에 맞선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지금 시민 저항의 연장선으로 치환하는 셈이다.
현재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에 집착하는 내란 세력 앞에서, 시민의 저항 정신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된다. 이에 영화는 도덕적 용기와 희생의 본질을 현재의 관점에서 다시금 상기시킨다. 영화의 주제는 독립운동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대의 정치·사회적 공정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며, 분석하고 힘주어 나아가는 행동과 성찰로 다가온다.
영화 <하얼빈>은 초반 전장의 잔혹함을 보여주며 독립운동의 폭력적 필연성에 설득력을 더한다. 일본 제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체계적인 탄압 속에서,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은 무장 저항이었다. 안중근은 폭력을 파괴만이 아닌, 자유와 생존을 위한 필연적 도구로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동료들 간의 신뢰와 인간성을 지키는 중요함을 요청한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에게 폭력의 필요성과 그 너머를 동시에 숙고하게 하며, 전투 장면 속에서도 동지애와 희생의 의미를 각인시킨다.
전여빈이 연기한 공부인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녀의 눈빛과 절제된 대사는 인물의 깊은 내면을 섬세히 전달하며, 독립운동 내 여성들의 역할을 강렬하게 조명한다. 독립운동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극 중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며 독립운동의 다층적 구조를 보여준다. 공부인 캐릭터의 서사는 울림마저 선사한다.
영화 <하얼빈> 스틸 컷. 맨 오른쪽이 배우 전여빈(공부인 役)
우민호 감독은 영화에서 대중적인 서사와 예술적 깊이를 조화롭게 담아냈다. 비록 몇몇 서브플롯이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관객의 감정과 지성을 동시에 자극한다. 감독의 치밀한 연출과 배우들의 설득력 있는 연기가 보태져 이러한 균형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하얼빈>을 단순한 상업 영화가 아닌, 예술적 성과로도 주목받게 만든다.
영화의 주된 장면은 대낮의 거리에서 활보하는 화려함보다는 은밀하고 어두운 밀실에서 작전을 논의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 전반의 어두운 흑백 톤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마주했던 현실의 암울함을 더욱 고조시킨다. 눈 덮인 풍경은 그들이 맞서야 했던 고난과 자유를 향한 여정이 험난했다는 걸 상징한다.
영화 <하얼빈>은 김훈의 동명 소설에서 보이는 인물의 내적 탐구와 잔잔한 서술의 정서를 영화적으로 담아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김훈 소설 특유의 내면적 고뇌와 역사적 맥락을 묵직하게 드러낸 문장의 향취는 영화에서도 저격까지의 장대한 힘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민호 감독의 영화는 소설과 관련이 없으며, 독자적인 대본이다.
그리고 잔잔한 서술과 심리적 갈등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몇몇 서브플롯의 밀도가 부족하고 캐릭터 역할의 개연성이 과다하여 관객의 몰입에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독립운동의 정신을 강렬히 전달하며 작금의 시대와 공명을 이룬다. 이는 역사적 기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가 마주한 도전과 연결되어 유효한 사유와 행동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