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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다은은 Nov 17. 2024

일제 강점기에서 현재의 우리까지 2

[리뷰] <철도원 삼대>와 노동자의 투쟁 (4-2)


소설에서는 여성 인물들이 부쩍 등장하면서도 부차적인 존재로 위치하지 않는다. 이백만의 아내 주안댁은 홀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가정을 이끌어간다. 신금이는 노동 운동에 헌신한 신여성으로,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남성 중심의 서사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확장하며, 가족의 생존부터 시대의 격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통과했다. 작가는 이들의 억척같은 삶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들이 절대 무력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또한 소설의 서사에 등장하는 유령은 사실적인 서술에 기초하면서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요소를 도입해 글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종횡하며, 가족의 삶과 시대적 고통을 한층 더 입체적으로 전개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요소는 판타지를 넘어, 역사적 상처와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여 접합하는 역할을 한다. 영등포의 유령들, 신금이의 예지력, 주안댁의 귀환 등은 모두 한국 사회가 겪어온 억압과 상처를 반영하고 있다.


이진오는 철탑 위에서 외롭게 버티며, 고립의 무게와 절망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낸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결코 고독 속에서 소멸하지 않는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끊임없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동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줄처럼 식사와 생필품을 올려보내며, 보이지 않는 연대의 실을 엮어 간다.


이것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뜨거운 약속이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희망의 불씨이자, 절박함 속에서 피어난 마지막 끈질긴 의지로, 노동자들이 마주한 가혹하고 좁디좁은 현실에서 가차 없는 선택이다.


작가는 이진오의 개인 서사를 역사의 맥락으로 다지며, 노동자의 저항이 하나의 몸부림으로 귀결되지 않는, 사회적 억압에 맞선 집단적 목소리라는 걸 생생하게 그려낸다. 또한 이진오의 투쟁은 복직이라는 경제적 요구가 제한되지 않는다. 그의 싸움은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소설은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도출하며, 이들의 정당한 요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해방 이후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요구했지만, 냉전체제와 국가 권력은 이를 정치적 이념으로 치부하며 탄압해 왔다.     




“우리는 전국 곳곳에서 평지를 탈출하여 허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름도 없고 가난하고 힘도 없는 사람들이 저희가 겪은 억울한 일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할 길은 험한 상황을 버텨내는 길고 긴 과정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며 겨우 한 발짝씩 아주 느리게 변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게 되었다.” 본문 407~408쪽 중에서     


이진오의 독백은, 노동자들이 현실의 억압 속에서 선택한 마지막 저항의 방식을 설명한다. “평지를 탈출하여 허공으로 올라간다”라는 표현은 고공 농성의 처절함을 담고 있다. 이는 그들이 더는 땅에 설 자리가 없음을 의미하며,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스스로 고립된 공간을 선택한 것을 상징한다.

사회의 변화는 느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외면받지만, 그들이 선택한 투쟁의 길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이어진다.     


소설은 이진오의 어린 시절 기억을 추스르며, 철도 건설이 가족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유지해 왔는지 보여준다. 이백만은 철도공장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면서, 아들에게 더 나은 삶을 꿈꾸고 가꾸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아들 이일철은 일본의 차별 속에서도 기관사 자리에 오르며, 또 제 아들에게 희망을 남겼다. 이지산은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다리를 잃었지만, 가족을 찾아 돌아왔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국 철도와 함께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을 형성한다.


이백만에서 시작된 가족의 이야기는 이진오로 이어지며, 각 세대가 철도와 함께 겪어온 변화와 투쟁의 기록을 형성한다. 이렇듯 작가는 유동적인 가족사를 펼쳐 보이며, 철도 건설과 운영이 교통수단이라는 기능성을 넘어선다는 걸 입증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맥락을 형성했거니와 소설의 중요한 제재(motif)임을 역사적인 고백이다.


철도는 시대와 역사를 연결한 메커니즘이자 산업화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담보로 삼았다는 걸 여실히 들춰낸다. 그러면서도 이 가문의 삶을 지탱하도록 해주었고, 여러 과정에서 표출된 투쟁은 철도의 궤적을 따라 이어진다. 이진오가 굴뚝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속에는 이 모든 역사가 빼곡히 숨 쉬고 있다.     


“카메라의 렌즈를 향하여 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이진오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울컥 하면서 목소리가 막히고 말았다. 온 세상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자본과 정치권은 물론이고 은행 법원 공권력 모두가 저희들끼리 한통속이 되어 힘 있는 자들의 손을 들어준다. 그는 갑자기 부끄러워서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본문 431~432쪽 중에서     


이진오가 카메라 앞에서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은 노동자의 절망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온 세상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라고 고백하며, 자본과 권력의 연합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깨닫는다. 은행과 법원, 공권력이 모두 한통속이라는 말은 체제의 공고함과 노동자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벽이 얼마나 높고 단단한지를 증언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자신의 연약함이 아니라, 자신이 마주한 세상의 잔인함과 냉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이 장면은 체제의 무력을 고발하며, 소설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진오는 마침내 철탑에서 내려왔지만, 발아래 펼쳐진 것은 기계 설비가 모두 사라진, 텅 빈 공장의 잿빛 풍경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뿌리 뽑힌 나무처럼 주저앉았고, 약속의 말들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사측의 부드러운 거짓 언사는 꺼져가는 불꽃의 잔불이었고, 한때의 온기는 손에 닿기도 전에 한 줌의 재로 흩어졌다. 남은 것은 싸늘한 기만의 그림자뿐이었다. 이진오의 투쟁은 일순간에 끝난 듯 보였지만, 그가 짊어진 싸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내려온 자리는 단지 철탑 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마다의 일상에서 고공 농성을 이어가는, 모든 노동자의 가슴속 깊은 곳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메아리 없는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무관심을 흔들어 깨우는, 먼지를 뒤집어쓴 지 오래된 종소리처럼 세상을 울리고 있다.


<철도원 삼대>는 노동 소설로 전개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구조에 억압받고 착취당한 이들의 목소리로 역사의 축을 직조해 낸다. 황석영은 이진오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울창하게 엮으며,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교훈을 전한다. 소설은 노동자들의 고립된 저항을 넘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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