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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08. 2024

실패했지만 망가지진 않았다

갭이어 1년 차.

두 달 뒤면 서울로 돌아갈 예정인데 나는 아직도 방황 중이다. 일년 동안 나 자신 탐구에 나름 열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으니 불안해진다.


흩어져있는 점들을 연결하다 보면 선이 되는 날이 온다던데. 마흔을 앞두고도 여전히 퍼즐 맞추기 하는 신세라 생각하니 우울해지려 한다.

그래도 우울해지지 말자. 회고하는 의미로 쉬는 동안 한 일을 정리해본다.


정원 가꾸기

시골살이를 시작하자 마자 정원을 만들었다. 한동안 눈만 뜨면 마당에 나갈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본격여름 무더위가 시작되자 열정은 순식간에 짜게 식어버렸다. 사실 더위보다 더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막무가내로 자라나는 이름모를 들꽃과 잡초들이었다. 나는 화분보단 절화가 좋은, 이미 잘 정돈된 정원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구매했던 장화와 일바지는 미련없이 나눔하였다.


명품 당근

몇 년간 신나게 사들였던 명품들을 당근으로 처분했다. 셀럽이 착용한 것을 보고 뽐뿌가 와서 산 옷, 가방, 신발, 주얼리 등 사실 내 취향도 아니고 어울리지도 않는데 ‘좋아보이려고’ 산 물건들이 왜 그리도 많은건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 지불한 비용이라고 퉁 치려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더 슬픈 건 여전히 이제 뭘 입고 뭘 걸쳐야 할지 끌리는 스타일을 찾은 것도 아니라는 것. 내 취향 찾기 한번 더럽게 힘들다!


미술관련 배움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그 시절 최선을 다하지 못했단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았다. 오랜 부채감을 청산하기 위해 찝찝했던 것들을 다시 배워보기로 했다. 미술치료과정을 수강하고 미술에듀케이터 공부를 했다. 일로 발전시켜볼까 하는 생각에 프랜차이즈 상담도 받아보고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내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이를 직업적으로 활용할지는 의문이 든다.

그 외에도 현대미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인문학, 영화제작, 예술글쓰기, 출판 강의를 수강했다. 대학 때보다 더 큰 열정을 가지고 재밌게 했지만 ‘문화예술’이라는 상위 주제에 맞닿아 있고 싶은 욕구를 확인한 것 외에 별다른 수확은 없다. 그저 지적호기심 하나를 채우기 위해 그 많은 돈과 시간을 할애한 것일 뿐인가. 체화시키지 못한 배움은 갈증만 더하는걸까.


미술 작업

이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작업도 해보고 싶어서 그림도 그려 보았다. 인물 드로잉, 크로키, 유화, 펜화, 수채화를 그렸다. 안 해본걸 시도해보고 싶어서 등록한 동양화 수업은 빠르게 포기하고 실패했다. 평균연령 65세 이상 어르신들 사이에서 삐약이처럼 앉아있다 현타가 와서 조용히 나왔다.

모작을 하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꼭 표현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작업을 해보고 싶은 욕구를 자세히 뜯어보지 못한 것 같다. 서울에 가면 포트폴리오 준비반 같은 것을 등록하고 당분간 이어나가 보기로 한다.


영어 공부

영어책 읽기 스터디, 영어 회화 수업도 했다. 그리고 또 하다 말았다. 영어 이놈의 새끼는 언제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내 인생 최대의 숙제다. 이번엔 쉬는 김에 꼭 성실히 배우겠다 했는데, 호오 탐구를 하다보니 뭔가 붕 뜬 상태가 되어 다시금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영어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딸 유학 때 같이 가서 배우려고 하는 계획 정도만 남겨두었다.


여행

1년 동안 6개국의 나라를 여행했다. 일본 두 차례, 홍콩, 스페인, 핀란드, 에스토니아, 몽골.

여행은 늘 좋다. 처음으로 여행 크리에이터가 좀 부럽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갭이어를 속초에서 보내며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이 생활이 생각보다 할만 해서 내 인생 거주지를 한국으로만 제한하지 말자는 생각도 하게 된 한 해였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일과 예술’이라는 나만의 주제를 가지고 다니니까 관광이 아닌 구체적인 경험이 되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여행은 최대한 되는대로 많이 다니자고 생각했다. 다만 비용을 현명하게 쓰는 쪽으로.


운동

런닝, 등산, 요가도 하고 필라테스도 반년 넘게 다녔다. 겨울엔 시즌패스를 끊어 스키장도 갔다. 이것 저것 해보며 느낀 점은 철인이 되거나 풀코스 마라토너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도 운동을 지속하려면 커뮤안에 들어가는 게 유리하다는 점. 나란 녀석 물도 싫고 산도 싫은 건 이제 알겠다. 어차피 운동은 살기 위해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히 할만한 종목을 찾아봐야겠다.


총평 : 실패, 그러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님

대충 큰 것들만 정리해본거지만 결과물로 평가를 해본다면 이번 갭이어는 실패다. 비용 대비 효용으로 따진다면 그냥 실패도 아닌 대실패라 할 수 있겠다.

나를 나답게 살기가, 생긴대로의 나를 찾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라니. 생각을 하는 일이 이렇게나 피곤한 일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도 나름의 위안을 얻어보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안 것과 그보다 더 많은 싫어하는 것들을 안 것, 제거할 것을 정의한 것, 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하고 구분한 것은 확실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실패는 했지만 갭이어가 망했다고 내가 망가졌다고 하진 않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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