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쪼개어 너와 만난, 가장 길었던 하루

자연분만, 처음 느껴보는 고통 그리고 행복

by 윤슬

"여보, 오늘은 아닐 것 같아. 고생했는데 시원하게 한잔해."

그날 밤, 나는 남편의 손에 술잔을 쥐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내 직감을 너무 믿지 말았어야 했다.
유난히 회사 일로 지쳐 돌아온 남편의 어깨가 안쓰러워 내뱉은 나의 '관대한 허락'은, 불과 한 시간 뒤 우리 가족의 역사를 새로쓸 거대한 폭풍의 전야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막달의 임신부에게는 묘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길 때가 있다. '아직 배가 덜 내려왔어', '이건 가진통이야' 같은 나만의 데이터들. 남편은 내 당당한 선언에 안심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근처 바닷가로 밤 산책을 나섰다.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던 그때였다.

'툭-'

풍선이 터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얇은 실이 끊어지는 것 같기도 한 낯선 감각. 뒤이어 따뜻한 액체가 느껴졌다. 양수였다.

"여보... 나 양수 터진 것 같아."
"어? 뭐라고? 지금?"

시원한 바닷바람 사이로 남편의 당황한 목소리와 붉어진 얼굴이 비쳐졌다. 방금 전까지 "오늘 아니야"를 외치던 나의 호기로움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음주 상태'의 남편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내가 운전할게. 가방 챙겨줘"


조수석에는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남편을, 운전석에는 배가 남산만 한 만삭 임신부가 앉았다. 양수가 계속 새어 나오는 묘한 불쾌감과 금방이라도 진통이 몰아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나는 핸들을 꽉 잡았다.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질주'였다. 조수석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을 되려 내가 다독리며, 그저 '제발 병원 갈 때까지만 진통이 참아주길' 기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시간은 잔인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밤 9시 입원.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던 아이는 밀당의 고수였다. 진행은 더뎠고, 진통의 파도는 시간이 갈수록 나라는 인간을 조각조각 부수어 놓았다. 무통 주사도, 간절한 기도도 몰아치는 고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며 술이 깬 남편은 어느새 땀범벅이 된 내 손을 붙잡고 함께 밤을 지새웠다.

'나를 쪼개어 너를 만난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뼈가 벌어지고 영혼이 탈탈 털리는 그 24시간 동안 온몸으로 배웠다. 어제 저녁, 평화롭게 술잔을 부딪치던 우리 부부는 온데간데없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직 '탄생'만을 기다리는 두 짐승만 남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밤 9시. 꼬박 하루를 채운 사투 끝에, 드디어 우주가 열리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응애- 응애-"

어제 그 바닷가 산책길에서 터진 양수는, 이 아이가 세상을 향해 보내온 간절한 신호탄 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이가 내 가슴 위에 올려진 순간, 거짓말처럼 24시간의 고통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된 남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아이를 보려고 내가 어제 그렇게 큰소리를 쳤나 보다.'

처음 느껴보는 원초적인 행복이 차가운 병실 안을 온기로 가득 채웠다. 고통은 길었지만, 그 끝에 만난 너는 눈이 멀 정도로 찬란했다. '찬란하다'라는 말을 나의 삶에 처음 써내려간 날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쪼개어 너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