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비정전 - 왕가위

Days of Being Wild (1990)

by 인문학애호가

턴테이블위에 놓인 음반에 바늘이 올려지고, 제이비어 쿠가트 (Xavier Cugat) 악단이 유명한 맘보곡 "마리아 엘레나 (Maria Elena)"를 연주하면, 흰색 속옷차림의 장국영이 곡에 맞춰 작고 은근한 몸짓의 춤을 춥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둘도 없는 명장면 중의 하나가 됩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장 왕가위 감독의 대표적인 걸작 "아비정전"의 한 장면 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갖는 고독의 깊이를 가장 뛰어난 분위기로 잡아낸 걸작입니다. 물론 영화가 극장에 처음 걸리던 시절에는 멋진 "스토리텔링"을 기대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관객의 환불 소동도 일어났다고 하나, 이후에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양조위가 아니라 분위기였다는 사실이 이해되고 재평가를 거쳐 오늘날에는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엽이 거의 다 떨어진 늦가을이 되면 한 번 씩 봐주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정상 상영시간도 지루하다면서 2배속으로 돌려보는 요즘 시대에는 이 영화는 관객이 단 10분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거의 0.5 배속으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하고 잠시 기다리고, 대화도 길지 않으며, 정상적인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뜬구름 잡는 얘기가 이어지고,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사와 대사사이에 놓인, 등장인물과 등장인물 사이에 놓인, 그리고 등장인물과 배경 사이에 놓인 그 칙칙하고도 아련한 분위기가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순간, 이 영화의 1분 1초가 매우 소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비정전"의 또하나의 큰 매력은 주옥같은 삽입곡들 입니다. 재즈에 조예가 깊었던 왕가위 감독의 기막힌 선곡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아비정전"의 "아비"는 물론 주인공인 장국영의 배역이름 입니다만, "방황하는 청년"이라는 뜻이라고 하고, "정전"은 물론 "진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즉, "방황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에는 당시에 "4대천왕"이니 하는 별명이 붙었던 홍콩의 1급 남자배우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렇게 1급 배우들이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고 참여한 영화가 얼마나 될까요. "왕가위"라는 톱스타 감독의 지명도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물론 "장국영"의 영화가 맞습니다만, 그외의 모든 배우가 최고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하다못해 거의 마지막에 잠깐 나오는 양조위 조차도 그 분위기의 연출이 아주 멋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유가령(양조위의 실제 아내)의 연기가 정말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매력 만점 입니다.


아비(장국영)는 어렸을적에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입양을 보냈고, 새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또 그 어머니가 필리핀에 살고 있다고 들어, 꼭 찾아뵈려고 합니다. 그런데 타고난 매력으로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립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면 축구협회에서 티켓을 판매하는 "장만옥"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탁월한 언변으로 자기 사람으로 만듭니다. 잠시 동안만. 곧이어 양어머니의 바람난 현장을 덮치다가 "유가령"을 만나게 되고, "유가령"의 적극적인 대쉬에 바로 연인이 됩니다. 역시 잠시 동안. "유가령"은 "아비"의 친구인 "장학우"가 흠모하고 있습니다. "아비"에게 차인 "장만옥"은 방황하다가 매일밤 거리 순찰을 나오는 경찰관 "유덕화"와 말벗이 됩니다. 그런데 "유덕화"는 경찰을 버리고 "선원"이 되는 것이 목표 입니다. 이처럼 이렇게 만나고 저렇게 헤어지면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청춘들의 감정 싸움이 골이 깊어질 무렵, "아비"의 양어머니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미국으로 간다고 하고, "아비"는 필리핀으로 친어머니를 찾으러 갑니다. 자신과 염문을 뿌리던 여인을 모두 버려둔채. 그러나 필리핀에서는 친어머니의 얼굴도 못보고 박대를 당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유덕화"에게 구조됩니다. "유덕화"는 정말로 원하던 "선원"이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모든 돈과 여권을 소매치기 당한 "아비"는 필리핀 업자에게 여권을 요청하고, 돈을 안주고 업자를 칼로 찌르고 여권을 빼앗어 도망치다가 업자의 수하들과 싸움이 붙습니다. 여기서 "유덕화"가 또다시 구해주고, 둘은 같이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그러나 기차속에서 업자의 수하에게 총을 맞고 사망의 위험에 놓인 "아비"는 "유덕화"와 "장만옥"과의 사이를 알고 있으며, 그녀에게 자신을 잊으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고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영화가 종료되기 직전에 좁은 방에서 "양조위"가 옷을 갖춰입고 나갈 준비를 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장국영의 그 멋진 맘보 댄스 장면 입니다. : https://youtu.be/SIRM4HuxAho

작가의 이전글엘리오 vs 케이팝 데몬 헌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