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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라 Nov 16. 2024

10.두 번 바람+a핀 남편과 사는 아내의 일기

깨진 바가지를 사용하는 방법


24.10 31

마트 화장실에 들렀다가 깨진 바가지를 보고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남편의 외도 깨진 그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참 고민이 많았었다.
깨진 그릇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고민해 봐도
깨진 그릇에 음식을 담아 쓸 재주는 없었다.
새는 바가지에 뭘 담아봐야 계속 새는데
음식만 아까울 뿐이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버리 방법밖에는.


방도를 못 찾아서

깨진 그릇은 버리.

대신 계속 살아보기로 했으니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듯, 

새 그릇을 받아 새로이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깨진 바가지를 보니 그때의 치열했던 고민이 떠오른다. 



깨진 바가지를 보니 오래전에 깨진 컵에 비유됐던

내 얘기 떠오른다.
7~8년쯤 전에 예술 놀이 명상 치유 지도자 과정을 수료했었다. 3달간 이어진 프로그램이 끝나고
강사님께서 1:1 면담을 해주셨다.

“수수깡을 세로로 세워서 이어 붙여 만든 컵이 있다 치자.
네가 가진 수수깡의 키가 대부분 7cm, 8cm의 무난한 길이에  10cm가 많다 해도, 단 한 개가 2cm라면
그 컵에 물을 담아 쓸 수 있겠는가?

2cm의 짧은 수수깡이 있는 곳으로 물이 다 새는 컵이 아무리 좋은 컵이라도 써 볼 도리가 없다.

그런 것처럼 훌륭한 면이 많아도
한두 개의 치명적인 과락이 있다면
제대로 쓰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너에게 그런 면이 있다.
바로 겸손치 못한 오만이다.”

과락 점수 과목은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였다.

그 면이 겸손치 못한 오만을 낳는다고 하셨다.
현실성이 없어 현실에 두 발을 딛지 못하고
자꾸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아?
인간이 어떻게 그래?

저 사람은 왜 저래?
같은 무수한 질문들이 그것이었다.

너의 소명은 Wounded Healer(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단언하셨다.

기대치가 높다는 게 뭔 말인지는 알 것 같았으나
'그것이 삶의 치명타까지 될 수 있을까?
내 소명을 어떻게 저렇게 단언하실 수가 있을까?'
 의아함을 품은 채, 당장 소화되지 않

의문은 나중을 기약하며 마음에 간직해 두다.

그 시기 친구 따라 강남 가서 평소에 보지 않던 사주를 보았다. 관록 있는 선생님이라고 추천해서 따라가 앉았다.

그 선생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주셨다.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5배 높다. 겸손 공부다. 이번 생, 당신의 공부이고 숙제다.”
내 금생의 숙제를 사주 한번 보고 단언하신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명상을 하고 있다는 얘기에
길흉화복 벗어나 삶의 공부를 얘기해 주셨다.

권위자들 두 분이 같은 얘기를 해주시니
내 귀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있겠거니 해도,
당장 마음에 쏙 와닿지는 않아
나중을 기약하며 마음의 서랍 속에 간직해 두었다.






마음공부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몸공부, 정공부, 돈공부.
이 세 가지의 목표는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무심해지는 것이다.

내 경우는 주로 정공부(인간관계)에 걸려있다.

남편의 4년여의 두 번째 외도와 +a인 끈질긴 여사친들 문제를 접한 49살에 무너지면서
인간에 대한 관념을 대폭 수정하게 되었다.


기존의 관념의 그릇 안에는 도저히 이런 사실들을 담아낼 수 없어 몸부림을 친 결과였다.

고정관념이라는 그릇이 깨지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됐다. 죽고 싶은 순간도 었을 정도로.

이제껏 '인간이 그럴 수는 없다.'라고 믿었던 이야기를 '간이 그럴 수도 있나 보네?'로 바꾸는 작업은 고되었다.


몸부림 끝에,
내 기대치가 비현실적으로 높았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가
첫 번째 외도를 알고 나를 굉장히 괴롭혔던 질문이었다.

두 번째 때에도 ‘인간이 어떻게…’ 타령이 계속되면서, 내 기대치를 하향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변화된 상황에 맞춰 살기 위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깎아내면서 변해야 했다.

생각 하나 바꾸는 게 그렇게나 힘든 일일 줄이야...


기존갖고 있던 기준으로는 나약함, 이기적 면모, 흔들림, 악함, 나태, 부도덕, 거짓, 의존성, 위선, 비겁, 회피 등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격사유였다.

부족하능력하다고 판단해 왔다. 

그러니, 걸리는 면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남편같이 살겠다는 목표를 켜내기 위해,

판단 기준을 하향조정해서기준 치를 수정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야.
인간은 원래 나약하고 흔들려.
인간은 원래 환경에 지배당해.
인간이 원래 악한 면이 있어.
인간이 원래 남이 안보는데서는  악할 수 있어.
인간이 원래 대부분이 멍청해.
인간이 원래 도덕을 안 지키고 싶어 해.
인간에게 거짓말은 본능이야.

인간은 원래 자기 욕망이 제일 중요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한 축에 드는 거구나.
책임지는 걸 마땅히, 좋아하는 인간이 대단한 거구나.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내 기준치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구나!

완벽함이 평균치라 생각해 왔으니,

나 자신을 포함해 양이 차질 않았구나!

모자라  보이는 모습이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였던 모양이다.


변화된 상황에 살기 남기 위해 뼈를 깎아낸 고충으로,

수용력이 늘어난 마음이 좀 편해지고,

삐죽이고 시끄럽던 속이 좀 조용해졌다.

기준 하나 바꿨더니,

나에게도 자유와 평화가 선물처럼 따라왔다.


오만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나였다.

완벽이 기본이라 믿었던 높은 판단 기준

나 자신을 가장 괴롭혔다.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에 현미경을 들이대고서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수치스러워했다.

이기적인 면이나 나약함, 나태함, 악함, 멍청함을
스스로 비난하고 죄악시했던 관점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꾸준한 훈련으로,
‘이 정도야 뭐, 인간이 원래 이래. 나도 그지, 뭐.’라며 걸림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타인에게 들이댔던 완벽이란 잣대도 너그러워져

흘려 넘기는 부분이 많아졌다.

사람이 사는 '꼴'을 보는 게 더 수월해졌다.

꼿꼿한 감시의 눈초리가 사라지고
사는 게 걸림턱이 낮아 수월해진 느낌.

완벽이란 짐에 무겁게 눌려, 안팎으로 세모눈을 뜨고 살았던 과거의 내가 겹게 보인다.

어제는 “겸손은 나를 낮추는 게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것”이란 말을 유튜브에서 들었다.


기대치가 높으면 겸손하기 힘들다는 말씀에 동의한다.


완벽이라는 기대가 없는 상태가 자유롭게 한다.

포기한다는 뜻과는 다르다.

마음을 비우고 있다는 뜻에 가까울 듯하다.

나다움, 더 나아가 너다움에 생각이 미친다.


남편이란 정공부의 스승이자 보석 같은 선물 상자.
불행이란 포장지를 벗기니
이토록 창대한 자유와 기쁨이 깃들어 있었.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다.
아팠지만 나를 성장시켜 준 선생이다.


그렇다고 지금 완전히, 온전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내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

외국 속담에 행복은 불행과 짝으로 온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면만을 보고 이해했던 나에게
남편의 첫 외도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사람은 옆면도 뒷면도 숨기는 면도 있는 입체적인 모습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이 때로는 위선적인 모습이 되기도 한다는 것도 알았다.

두 번째 외도에는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가시처럼 긁어댔던 많은 기대와 판단들이 가라앉은 셈이다.

완벽이나 완전아니라
온전한 나다움, 온전한 너다움의 가치를 소중히 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서로 다름에 대한 존중도 조금 스며들었다.

49에 남편의 두 번째 외도로 위기를 느끼면서 50부터 내 삶을 세워가는 공부를 치열하게 하면서 운디드 힐러의 길에 들어섰다.

두 분 선생님의 말씀이 족집게 과외였던 셈이다.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바람결에 전한다.
불행의 시간을 견뎌온 나 자신에게도 수고했다고 인사를 전한다.






한 달쯤 지나 다시 이 바가지를 보았는데,

물이 담겨있었,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깜! 짝!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많이 깨진 바가지에 이렇게나 물이 많이 담겨 있다니... 충격적이다.

멀쩡한 쪽을 보면 물의 수위가 제법 높다.




깨진 바가지를 쓸 수나 있겠냐고 한심해했던

나에게는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제야 쓸 수 없다는 내 기준이

선판단이었음을 알았다.


생각보다 많은 물이 담겨 제법 쓸만해진 바가지의 비결은 바로 <바닥의 기울기>였다.


바가지의 온전한 면 바닥면이 낮고,

깨진 쪽의 바닥면이 높으니,

온전한 쪽으로 기울어져 물이 더 많이 담긴 것이다.

기울어진 그대로 바가지를 고 옮기면

물을 흘리지 않수도 있다.




자세히 사진을 보면 바가지 안쪽에 진한 갈색으로 낀 물때가 보인다.

평소에 바닥의 기울기 없이 평평하게 놓으면

물이 저 갈색선까지만 차는 모양이다.

바닥의 기울기를 깊이 하니, 훨씬 많은 물이 담긴 것이다.


매직처럼 보게 된 장면

고정관념이 깨졌고, 그 자리에 지 사랑을 얻었다.


깨진 바가지 자체로 쓰기에는 결손이 크지만,

그것이 놓인 환경에 변화를 주니 쓸 만 해진다는 것.


남편이라는 깨진 바가지의 주인으로서 희소식이기도 하지만,  더  의미가 있다.


위에서 명상지도사 선생님이 언급했던 처럼

도 한쪽이 깨진 듯 온전치 못해  쓰이던 컵이었 때문이다.


남편과의 정공부 덕분에 부대끼며,

조금은 자랐을지라도

워낙 미달치로 태어나 여전히 과락일 텐데

컵에 물을 더 많이 담아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깨달음이다.


'나'라는 평생 함께 해야 할 단 하나의 바가지를

못마땅하다고 홀대하거나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라는 깨진 바가지의 온전한 면에 집중하자.

장점, 강점, 나에게 좋은 점을 바라보며 무게 중심을 실어 기울기에 변화를 주자.

더 쓸만해질 것이다.


나라는 깨진 컵의 온전한 면에 집중하여

강점에 힘을 실어주자.

더 유용해질 것이다.


사고를 제한하지 말자.

내 가능성을 놓지 말자.


겸손 공부니, 남편 문제니,

그 순간순간은 어둡게 찍힌 점일지라도

그 순간을 지나고 또 다른 순간들의 연속점이

찍히며 그려지는 그림이 볼만하다.


순간순간 힘이 들어도

멀리서 보면 변화가 있고, 반전이 있는

삶이 보람 있고 재미가 있다.


깨진 바가지를 만난 행운에 감사한다.

성장을 도와주시는 하늘에 감사드린다.(무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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