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
20대 중반 쯤 엄마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
급하게 구급차로 이동중임에도 서초동에 위치한 카톨릭성모병원으로 병원을 지정하였다.
진료기록이 그곳에 있어서도 아니고, 학연, 지연을 이용한 수술의 편의성을 위함도 아니였다.
병간호를 맡아서 할 나의 출퇴근을 고려한 것이 전부다.
근무지가 서초동이었던 나는 한달 이상을 퇴근하며 엄마의 병실로 또 다른 출근을 했고, 아침이면 엄마의 병실을 나오며,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집에가 밀린 빨래며 집안일을 했다.
착한 딸인 나는 그렇게 하는게 너무도 당연했기에 불평불만 없이 엄마 옆을 지키던 어느 날.
병실로 친척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뭐지??
엄마와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위해 병자성사를 드리고자 신부님이 오시면서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아..엄마가 이렇게 계시다 호전되어 퇴원하는게 아니고 떠나가실 수도 있는거구나...
나에게는 한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내가 착한 딸로 클 수 밖에 없었던 지분을 많이 보유한 나와는 너무도 다른 언니다.
장녀라는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어 실제로 아무것도 하는게 없는 언니다.
하다못해 자기 빨래도 직접 하는 경우가 없었다.
엄마가 입원할 당시 책임감만 가지고 있던 장녀는 백수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의 편의를 위해 굳이 서초동에 입원을 하신거다.
역시 엄마한테는 내가 전부야~!
병자성사를 드리고자 신부님까지 모셨지만 약속된 시간에 진행할 수 없었다.
모두가 모여있었지만 엄마는 몸부림을 치며 지연시켰다.
엄마에게는 모두가 아닌 유일한 '큰 딸'이 도착전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이다.
'나는 너 밖에 없다'
'이 다음에 내가 살아도 너랑 살지 큰애랑은 못산다'
'엄마가 믿을 사람은 네가 전부다'
철썩같이 믿었던 엄마의 말은 하얀 거짓말로 남았다.
당신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자리에서 찾는 건 큰 딸이였다.
그랬다.
믿고 의지할 자식은 내가 아니였다.
느껴지는 배신감으로 나는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나는 달라졌다.
집안의 막내가 떠안고 있었던 가장의 역학을 내려놓았다.
도맡아 하던 집안의 살림에서 손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