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27. 2024

코로나19가 끝나도 마스크는 착용

수필: 왜 그럴까? 

우리가 대유행을 겪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그 유행 당시 많은 노인들이 생명을 잃었고, 어린 취약계층 또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건장한 성인 남녀는 운이 나빠야 겨우 운명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심한 독감으로 치부되었다. 당시 사회는 너무나 병약하여 사람과의 만남을 금지시켰고, 모두 자택에 머물며 살아숨쉬기만 할 수 있었다. 그런 시기는 약 2년이 지나며 서서히 해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끔 그 시기의 상징과도 같았던 마스크를 여전히 지니고 다닌다. 특히 지하철에서는 대부분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지만, 이상하게도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얼굴을 가리며 코와 입을 막고 눈을 꿈벅꿈벅 뜨지 않은 채 돌아다닌다. 그들이 단순히 감기 기운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던 시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마스크가 마치 그들의 정체성이 된 것은 아닐까.


사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쓴다고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추악함이 드러나지 않는 걸까? “추악해도 괜찮으니 자신 있게 얼굴을 보여달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고된 감기에 걸려서 그런 것이라면, 나의 의문은 헛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익명성을 유지해야만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흉칙한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주의적인 밀레의 그림 <만종>처럼 그 시대를 그린다면, 파란 마스크가 몇 개 등장할 것이 뻔하다. 렘브란트가 그렸다면 익명성 대신 사람들의 본연의 모습을 그려냈을 것이고, 다빈치는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더 이상 마스크 속에서 입이 찢겨진 빨간 마스크의 살인마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업무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