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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찬 Nov 09. 2024

*켄터키에서 해고

맥스웰몰츠의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두번째 실패,  켄터키에서 해고

 

            “아니~ 그게 아니고”

            “헬로~”

            “헬~”

            “삐- ----“

아니 잠깐~  멀리서 상대방의 전화가 끊긴 소리가 길게 들린다. 이게 내가 켄터키에 내려온 이후에 본사와 하던 마지막 전화였다. 이 전화를 걸기 위해서 나는 며칠 밤을 잠을 자질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켄터키에서 해고 통보를 받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통화하고 있던 사람은 이 켄터키에 내려올 때 발령장을 내린 CEO였다. 그땐 잘 내려가서 열심히 하라고 했던 CEO였다. 해서 열심히 해서 이 공장이 돈을 벌게 해 줬더니 켄터키에 있는 회사를 캐나다에 있는 글로벌 회사한테 팔아버릴 결정을 이 CEO가 했다. 새로 합명에 성공한 글로벌 회사는 이 켄터키에 있는 회사를 사면서 북미 시장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돈을 벌게끔 뼈빠지게 고생했던 나는 완전히 낙동강의 오리알 신세였다. 나는 좀 오래 있을 것이라 예상해서 몇 개월 전에 꿈에도 그리던 언덕 위에 하얀 집까지 이주했었는데, 마치 배신당한 실망감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전화를 걸어 이 회사의 CEO한테 내 사정을 얘기를 하고 6개월간의 봉급을 구걸하고 있었다. 요청이 아니라 구걸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켄터키의 집에서 빠져나가려면 그동안 먹고 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큰아이가 전에 살던 집에서 버스를 세우는 사건이 생긴 이후에 아내는 계속 집을 이사하기로 원했고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하나를 보았는데 마치 그게 천정도 아주 높은 스위스식 집으로  유리도 앞에 있고 남향집이었다. 결국 그 집에 마지막 내가 낼 수 있는 돈과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을 모두 빌려서 투자를 했는데 그 주인이 달라는 돈보다 훨씬 적었었다. 그래서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면 아마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일단 할 수 있는 최선의 다했더니 주인이 우리를 가엽이 보았는지 이 집을 주기로 결정했던 거다. 그래서 우리 집은 이 집에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들어왔는데 이 어렵게 들어온 집에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회사가 합병이 되면서 이 사달이 난 거였다. 합병이 되면 가장 봉급이 많은 자였기 때문에 일 순위 해고 대상자였다. 그러니 이와 같은 합병은  이렇게 너무 열심히 해서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놓은 나한테는 보답은 없고 되레 지금까지 일급비밀처럼 지켜온 CEO의 배신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망할 놈, CEO의 사약한 자질로 밖엔 어찌 달리 해석되질 않았다. 어제까지 밤늦도록까지 일만 죽어라 하고 해 왔던 나는 마치 모욕당한 느낌, 배신당한 느낌,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는 내 얘기를 다 듣기 전에 상대방의 저쪽에 뉴욕에 있는 CEO가 전화를 먼저 끄는 것이다. 

“삐~” 

전화음 소리는 계속 울렸고 나는 수화기를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걸 내려놓는 순간 내가 기댈 수 있는 본사와는 마지막이라 생각이 들어서 내려놓지 못했다. 이 참담한 느낌으로 지하실에서 홀로 앉아서 전화를 걸었을 때는 아내가 혹시 이런 얘기를 들을까 봐서 조심조심 그리고 더 조심해서 수화기에 숨죽여가면서 전화했었다. 분명히 아내는 2층에 있었고 나는 지하실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구걸하는 내 목소리가 어쩌다 들리게라도 된다면 존심 상하고, 혹여 떨릴 수도 있는 그 처량한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날 항상 요술램프에 요정 정도로 항상 날 능력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서 이런 추하고 망가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두려워했던 일이 발생되었다. 아내는 2층에 있고, 내가 지하실에 있으면서 전화하는 수신음 가는 걸 어찌 알고 그 대화의 모든 내용을 듣게 된 모양이었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저벅 저벅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조금 지나선 지하실 방문을 빠끔 열였다. 문과 문짝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반쯤 빠금 보이더니 거의 늘어져서 땅바닥에 떨구고 있는 날을 보고 얘기했다.

            “ 그 뉴욕에 있는 상사란 얘기를 했는데 흐느끼는 것 같데…… 목소리가.”

그리고 문을 다시 닫고 그냥 올라가 버렸다. 난 그 순간 머릿속에 무척 복잡해졌었다. 나의 창피함이 들킨 것에 대한 그런 모멸감도 있었고, 같이 살대고 사는 아내가 그냥 삼자처럼 느껴져서이고, 이런 싸움이 나 혼자라는 것이 나는 외롭고 힘들게 했다. 아내는 장모랑 비슷해서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했다. 아내의 부족함을 보담고 살아 왔었는데 그날 CEO에게 당하고 혼자라고 생각되고 있을 때 이젠 내가 혼자라도 돌아가야 할 품저차 없어진 느낌 때문에 나는 침대에 그냥 벌렁 누워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멘붕상태를 한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었다. CEO한테서 배신당하는 씁쓸한 기분. 그다음에 내 아내한테서 받지 못하는 위로 등등이- 그때 나에게 필요했었는데- 예상대로 오질 않았고 그걸 기대했던 난 그땐 무척 힘들어했었다. 

나는 그때의 씁쓸 기억을 20년 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걸 풀리는 날이 있었다. 장성한 아들이 믿는 마음이 들어서 이런 얘기를 한 번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군대까지 제대하던 날이였다. 큰 녀석이 달라도 많이 달랐고 고맙게도 많이 성장해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아빠가 너무 큰 사람이고 또 약해있는 걸 본적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 생겨도 항상 큰소리치고, 당당했었는데 그날 무너지는 걸 보고 아빠한테 가서 위로하기보다 엄마로서도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을 거야"

라고 하는 거였다. 사실 이럴 수도 있다고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섭섭함에 매여왔었는데 그 섭섭한 매듭을 아들 녀석이 군대를 제대하던 날  풀어주고 있었다. 대대한 엄마에게 이 아들 녀석 밖엔 없었다. 그 당시엔 그저 그놈의 CEO한테 농락당했다는 원통함만 있었을 때 예상도 못 한 아내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기억뿐이었다. 사실은 그때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냥 안아만 줬더라면 엄청나게 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에 마지막 종착역이라 생각했기에 전활 매정하게 끊어 버린 그 CEO 놈, 아니 그놈의 가족까지 속으로 지옥에나 떨어지라며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 인생에 이토록 쓴맛은 진짜로 내가 취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일이 생겼나 회심까지 했었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자라서 그다음에 군대 가서 고생까지 모든 것을 했어도 군대 가서도 맞으면 내가 맞았고 남한테 해코지한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도 무심하신 건지? 이 상황이 박사 과정, 퀼리 떨어질 때 보다 더 심하게 아프고 힘들게 느껴졌었다. 아마 가족에 대한 부담감이 심했었던 것 같았다. 그다음부터 나는 지하실에서 처박히기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옆집에 있는 찰스 영감님 하고 로저 할머니가 있었는데 항상 그분들은 자기 텃밭에서 옥수수나 조그만 동그란 토마토를 재배해서 항상 토마토를 딸 땐 우리한테 주고 또 우리 아이들도 거기 가서 그 이웃집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이날부터 그 친한 사람조차도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가장 큰 건물이 월마트인데 차 기름을 먼저 넣어주던 슈퍼바이저도, 앞집 도요타 사장도 그리고 버리어 대학 학장도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관계가 다 날라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날 안 만나 줬던 것이 아니고 내가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엔 모든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나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날 점점 더 날이 갈수록 옥죄는 것은 분명했다. 이러다간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대체해야 할 것을 급히 찾아야 했다. 

그러면서 이번의 실패에선 뭐를 배웠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너무 열심히 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서 열심히 해야하고 남과 같은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요점임을  알았다.  어쨌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매일 몰트 법에 의해서 내가 잘 될 거라는 상상을 한 번도 빼지 않고 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때만 해도 내가 양자 물리학의 오비탈처럼 수소와 헬륨이 있는 가장 낮은 눈높이를 생각했던 게 뉴욕의 바텐더나 뉴욕의 웨이터의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그 처지를 당하고 보니까 사실 그 높이까지 가기 전에 내가 해야 일이  아직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그냥 눈 감고 다음 날아오는 강펀치를 앉아서 맞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소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묵상하면서 꾸준하게 이력서를 전 미국에 뿌렸다. 그때 직원을 뽑는 회사 중에 내 이력서가 안 들어간 곳이 아마 없었을 정도로  뿌렸다.  이번 이 사건으로 날 죽게 하지 않았으면 날 어떻게든지 살릴 사건도 생길 거란 생각에서였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이렇게 혹독한 불행이 있으면 그만한 량의 행운도 동시에 어딘가에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마지막  집 모기지를  내고 나니, 생활비도 없고 먹고 살 것도 다음 달에 없었다. 이런 기박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나는 잘 될 거라고 내가 자신이 스스로 칭찬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거기서 찰스 할아버지도 로즈 할머니도 그다음에 옆에 사는 도요타 공장의 CEO도, 또 그 아줌마도 그다음에 주변에 옆에 있는 버리아 칼리지 학장도 내가 지금 해고당한 날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라도 날 칭찬해야 했다. 하기야 아내까지  내가 이렇게 될 거란 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나 혼자라도 딛고 일어나야 했다.  자식은 지금 3살짜리 하나 그다음에 딸 하나 있는데, 잔디 깎을 사람을 고용할 돈이 없어서 뒤뜰에  52인치 잔디 깎는 엔진의 폭파 음울 내면서 시동을 걸어대고 있으려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잔디 깎는 장난감을 가지고 뒤따라오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이 가족들을 내가 여기서 아내 품에 안겨서 평평 울고만 있고 나약해져서 있었다면 이 가정을 다시 일으킬 사람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다 했던 것이 집 모기지 값 다 내고 그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그 상상력, 즉 잘 될 거라는 반복적인 칭찬의 말, 엄청난 이력서 그리고 수많은 전활를 돌렸다.   "이 장에 나오는 아이디어는 [Maxwell Maltz]의 [Psycho Cybernetics]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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