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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순이 Oct 25. 2024

영화 '걷기왕'

어쩌면 그냥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2016년 처음 봤던 영화인 <걷기왕>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모든 교통수단을 타지 못하는 만복이(심은경)는 집에서 2시간 거리의 학교를 걸어 다닌다. 공부에도 흥미가 없고,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는 만복이에게 담임선생님은 경보(빨리 걷기) 선수를 제안한다.



"다들 뭔가 될 것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나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복이는 불안해졌다."


"선배 말이 맞아요. 공부는 잘 못 할 것 같고, 운동은 쉬워 보여서 시작한 거예요. 근데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이거라도 안 하면 그냥.. 왠지 좀.."

"왠지 뭐?"

"무서워서요.."


비록 자신이 원했던 꿈은 아니었지만, 만복이에게도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 처음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하기 싫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로 경보를 시작했지만, 그런 자신과는 달리 경보를 죽기 살기로 하는 선배와 동료들을 보니 왠지 만복이는 위축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발가락 부상에도 불구하고 새벽운동까지 강행하며 전국체전을 준비한다.

무리해서 전국체전을 준비하는 만복이에게 공무원을 꿈꾸는 친구 지현이(윤지원)는 말한다.



"적당히 해라. 너 같은 애들이 갑자기 목숨 걸고 그러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
"무슨 말을 그렇게 재수 없게 하냐.
내가 열심히 좀 해보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잘못이냐고."
"누가 잘못이래? 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으니까.."
"아니, 내가 무리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아서 한다는데."
"좋아서 해, 네가? 경보를?"
"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 그래. 너는 평생 동사무소에서 등본이나 떼면서 살아라.(현이의 책을 던지며)"


무언가를 진정 자신이 원해서 시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국가대표 선수들도, 아이돌이나 배우들도 처음엔 우연한 계기로 혹은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혹시 나의 숨겨진 재능은 아닐까?' 희망을 갖고 시작한다. 그 순간만큼은 믿게 된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는 거라고.


꿈과 열정이 가득한 자기 계발서를 맹신하는 담임선생님은, 만복이 친구 지현이를 불러 면담을 한다.


"우리 지현이는 꿈이 뭘까?"
"공무원이요."
"아니, 공무원 그런 거 말고.
그러니까.. 진짜 꿈! 막 엄청 막 그런 거 있잖아."
"그러니까 공무원이요."
"아.. 아니 뭐. 세계여행이라든가 그런 것도 없어? 아니면 아이돌이나 여자대통령이나!"
"저는 그냥 공무원 돼서 칼퇴하고 집에서 맘 편히 맥주나 한잔 때리고 싶어요."
"응?"
"꿈이 어쩌고 열정이 어쩌고 저는 그런 거 딱 질색이에요. 그냥 적당히 하고 싶다고요."
"지현아.. 안돼. 벌써부터 적당히 하면. 지금 조금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야 나중에 더 크게..!"
"뭘 자꾸 이겨내요. 아니 그리고 힘들어죽겠는데 왜 참아야 돼요? 그리고 공무원도 존나 열심히 해야 되거든요? 뭐 이만복처럼 대회 나간다고 학교 땡땡이치고 그런 것만 열정이고 꿈이고 뭐 그런 거예요?"


공무원이 꿈이라는 아이에게 열정 가득한 꿈을 꾸라고 강요하는 선생님.

모두가 화려한 직업을 꿈꿔야 하는 건 아니잖아?

평범한 직업과 자신의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사는 것도 그 사람의 인생인 건데.


2016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열정에 미쳐있는 담임선생님이 싫었다.

그런데, 8년이 지나고 열정 없이 꾸역꾸역 현실만을 살아가는 세상 속다 보니 담임선생님이 왜 아이들에게 저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학생의 신분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열정을 강요받는 지현이에게는 그것이 버거웠을 것이고.

어른의 신분에서, 현실에 정해진 길만 걸어가야 하는 암묵적인 압박 속에서 살고 있는 선생님에게는 언제든지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이 찬란하고 예뻐 보였을 것이다.



한편, 전국체전에 출전한 만복이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오버페이스로 열심히 달리다가 후반부쯤에 가서 넘어지게 된다.

하지만 만복이는 달리지 않는다.

만복이는 그만두었다.


"근데 나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

어쩌면 그냥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만복이는 더 이상 경보를 하지 않지만, 만복이의 인생은 그대로였다.

더 나쁠 것도 없는, 더 좋을 것도 없는.

그냥 만복이의 똑같은 일상이었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조금 느려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꿈이 있어도, 꿈이 없어도 좋다.

어떨 땐 열정 가득한 삶을 살다가도, 그것이 버거워지면 쉬엄쉬엄 살아가기도 하고.

다시 뛰고 싶어지면 뛰면 되고.

단 한 가지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고 문을 열어놔야겠다. 아주 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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