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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족장님 Oct 22. 2024

나의 부모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호구 잡히기 딱 좋았던 나의 부모님

나와는 다르게 나의 부모는 법 없이도 살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에 허덕이는 가난한 집 육 남매 중에 둘째로

가장 먼저 서울에 상경하여 돈벌이에 나서야 했고

어머니 또한 가난한 집 (그나마 은 없던) 삼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아무것도 없었던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성실함만으로 내 집 마련이 가능했었던 시기였던 터라

나의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자양동에 작은 연립주택을 마련하는

쾌거를 이룩하셨었다.

그 영광과 함께 찾아온 건 아버지 육 남매 중 막둥이와

어머니 삼 남매 중 막둥이의 시골 유학 뒷바라지였다.

17평 작은 집에 부모님과 우리 3남매 그리고 두 삼촌들,

이렇게 일곱 식구가 모여 살았기에 흔한 계란 후라이 한번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누구 집 첫째, 누구 집 셋째, 누구 집 둘째 등등

수많은 객식구들과 함께 10년 가까이 살았더랬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상처뿐인 시간들도

너무 많았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두 삼촌들은 여전히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관계로 살아가고 있으나

나머지 다른 기타 등등 그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

그저 기타 등등이라고 부르고 싶은 딱 그 정도의 인간들


그런 의미에서 분당으로의 이사는

추첨제의 승리의 기쁨과 넓은 집을 갖게 되었다는 환희

그리고 온전히 우리 가족들만 살게 되었다는 해방감의

총체였었으나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전히 멀리 떨어져 살아도 어떻게든 하나라도 빼먹으려는

마음을 가진 몇몇 분들과의 불편한 관계

거절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약한 마음으로 결국엔

어머니가 먼저 무너져 내렸다.

겨우 5년, 병원생활을 뺀다면 겨우 3년

우리 가족들만의 우리 집을 온전히 누린 그 시간들은

너무 짧았다.

97년 병원 창밖으로 바람이 흩날리던 여름날

두 분 중에 어머니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고

그 이후로 여전히 거절 못하시는 나의 아버지는

여기저기 남들 좋은 일만 하다가

거기에 우리 집 진짜 막둥이 인생까지 잘 커버해 주시다가

2022년 , 어머니를 떠난 보낸 25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가셨고

난 두 분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조금 많이 억울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 또한 여전히 거절을 잘하지 못했었고

시간이 지나서 요즘엔 조금은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심히 뿌듯하다.

그리고 거절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좋다.

난 두 분처럼 착하게는 살겠으나

거절 열심히 착하게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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