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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경진 Oct 22. 2024

사진작가 준초이와 우도

제주에서 보내는 나날

7월의 복중이면 제주 김녕해수욕장의 코발트빛 바다가 눈부시게 끓어오를 때입니다. 건듯, 한 줄기 바람이라도 데려온다면 환영할 일이지요. 그 뙤약볕 아래에서 웨딩사진을 찍던 예비신혼부부의 하얀 발목이 떠오릅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 일 년쯤 제주에 내려가 해녀들 곁에서 지내고 싶다.’  

    

이런, 나보다 먼저 실천한 사람이 있었네요. 사진작가 준초이가 우도에서 사계절을 해녀들 속에서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책을 냈군요. 준초이는 광고사진가로, 인물사진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우도, 하면 우린 제주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코스의 하나로 칩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주는 마을버스에서 잠깐 내려 땅콩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보말칼국수를 늦은 점심으로 먹거나, 비양동 해녀의집에서 해산물 한 접시를 먹고 배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나오는 곳.     

준초이는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해녀들과 동고동락하게 되었을까요.     


2005년, 그러니까 8년 전의 일이다. 아마도 제주도의 섭지코지였을 것이다. …광고 캠페인 촬영을 하고 있는데 촬영 내내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촬영지 섭외 담당자에게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는 먼 바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리의 정체는 해녀들이 참고 참았던 숨을 내지를 때 나는 숨소리였다. …저 해녀들과 만날 수 없겠느냐고 무작정 졸랐다. 그는 의외로 자신의 어머니도 장모님도 해녀이니, 해녀를 만나고 싶으면 자기와 함께 우도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준초이, <<해녀와 나>>, 15쪽)     


그러니까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그를 그 섬으로 이끌었던 거지요.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그곳에서 해녀사진만 찍습니다. 이 책은 그 일 년의 사진기록이자, 하루하루 써내려간 해녀 사랑의 고백록입니다.     


준초이는 2013년 4월 1일, 제주행 페리를 탑니다. 카니발에 이부자리며 밥 해먹을 냄비 등속을 싣고 우도로 갑니다. 그러나 좀처럼 해녀들과 친해지지 못합니다. 광고계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무시무시한 사람. 촬영장에 들어서면 수십 명의 사람들을 거칠게 때로는 과장된 몸짓으로 다루었던 그. 그런 그가 해녀들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눈치만 살핍니다. 친해지고 싶어 애가 탑니다. 뭘 물어도 무뚝뚝하고, 지나는 길에 마주친 그네들에게 차로 태워다주겠다 해도 막무가내로 마다합니다. 심지어 묵고 있는 집의 개 홍이마저 육지 사람이라고 배척하는지 사납게 짖어댑니다.     


우도에 온 지 꼭 두 달이 됐다. 여전히 우도 사람들이 나를 꽤나 먼 나라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가도 이런 느낌조차도 어쩌면 상대의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격지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3쪽)     


그는 해녀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의 결기가 약한 것이라 판단하고 주소지를 아예 그리로 옮겨 주민이 됩니다. 제주시 우도면 천진리 1789-9. 비로소 배짱이 생겼습니다.     


우도는 4개리에 12개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제주 본섬에서 배를 타고 내리는 천진항은 천진리, 검멀레동굴이 있는 곳은 조일리, 보말칼국수가 맛있는 해광식당이 있는 곳은 오봉리, 하얀 모래가 눈부신 서빈백사가 있는 곳은 서광리. 주민은 준초이가 사진을 찍으러 들어간 2013년에 1700여 명이었다네요.      


 해녀들은 네댓 시간의 물질, 300여 번의 자맥질 끝에 파무침이 되어 망사리를 지고 뭍으로 올라옵니다. 그 안에는 소라, 멍게, 해삼, 전복 등이 그득한데, 무게는 보통 50kg 내외입니다. 준초이는 뛰듯 다가가 망사리를 들어줄 때도 있고, 해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날은 달걀을 50개 삶아 해녀들을 마중가기도 하고, 두유를 따끈하게 데워 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네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갑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해녀의 얼굴에는 많은 언어가 보인다. 해녀 어머니의 그윽한 표정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으니 묵직하고 깊다. 이 모습에 이끌려 여기 우도까지 내려왔다. 수없이 생과 사를 넘나들었을 이들에게 무슨 허례가 필요할까 싶어 도리어 나는 한 켜라도 더 벗긴 내 모습이 아니면 이분들께 실례가 될 것 같다. 하지만 해녀 어머니들은 이미 나를 다 꿰뚫어보듯 가만히 웃으신다. (38쪽)     


징헌 칼바람에 몸서리치는 봄, 습도 높은 장마에 일손을 놓는 여름, 숨비소리에 물드는 가을, 해녀사진이 차곡차곡 쌓인 겨울. 준초이는 해녀들과 마침내 무언 속에서도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됩니다.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을 아쉬워하며 우도에서 발길을 돌리지만 자신의 삶에서 또 하나의 매듭이 된 그날들을 갈무리합니다.     


…해녀는 숨비소리 지르고 나는 그 소리를 주워 담기 위해 그네들 앞으로, 뒤로 뛰고 자빠지며 몰아쉬던 숨과 숨, 그 사이에 우리가 있다. 사진가가 지르는 소리나 해녀가 터뜨리는 숨비소리나 모두 삶을 향한 공통의 숨소리다.  해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고, 계절을 모두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알았다.  해녀들의 사진을 찍으며 내가 찾아낸 것은 결국 나의 이야기,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해녀에 녹아들어가는 순간, 나는 나를 잊고 내가 나인 듯, 내가 너인 듯 바로 그런 착각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215-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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