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흔한 단어에 잘려 나간 너의 향을 적는 일
먹는 일은 꽤 중요한 일이라 유튜브 브이로그 같은 걸 봐도 음식을 소개하는 부분은 꼭 한 번씩 마주치게 된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음식점에 들어가 오늘 그의 점심 메뉴는 뭔지, 음식은 어떤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미식 경험을 넘겨받는다. 대개 그렇게 찾아간 골목 국숫집의 주인 할매는 하나같이 스뎅 국자처럼 허리가 꼬부라져 있다. 가게가 몇 년 되었냐고 물어보면 세다가 그만둬 기억도 안 난다는 답변이 대부분이다. 갓 나온 잔치국수를 보여준다고 핸드폰을 대접 가까이 대면 하얀 김이 화면에 가득 찬다. 일부러 더 그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면을 먹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생생하지만 맛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맛일까, 내가 얻을 수 있는 단서라곤 그의 입에서 나올 말뿐이다. 여기서 나는 늘 중대한 분기점을 만나는데, 그건 바로 맛을 표현하는 그의 멘트다. 고작 멘트 몇 마디로 그 사람의 미식에 대한 열정을 평가하는 일은 옳지 않다. 그러나 가장 난해하고 나를 애태우는 멘트는 확실하게 있으니 <와, 진짜 맛있어요!/맛있는데요?>에서 끝나는 일이다. 단서 하나 없이 살인 사건의 해결 의뢰를 받은 탐정이 이런 감정일 것이다. 차라리 맛이 없다고 했으면 궁금증이라도 덜했을 텐데 정말 화가 나는 일이다. 한국인으로 삼십몇 년은 살았으니 처음 보더라도 한국 음식이라면 어물쩍 그 맛을 상상할 순 있다. 이를테면 나는 아직 <김피탕>을 먹어본 적 없지만 그 맛을 대강이나마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느 먼 이국에서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음식을 먹고는 <진짜 인생 음식이에요. 여기 오면 이거 꼭 드셔보셔야 해요>로 멘트가 마무리된다면, 나는 미궁 같은 당혹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사실 요즘 세상에 정보가 부족한 일을 흔치 않다. 매일 단톡방에 올라오는 비밀스러운 투자 정보며, 오늘 단 하루뿐인 특가 라이브 세일을 진행한다는 인스타그램 메시지,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주말 나들이 명소를 알려준다는 뉴스레터, …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하며 머리 위로 쏟아진다. 좋은 정보(그들의 주장에 따르면)가 많아졌다는 건 분명 멋진 일이지만, 아쉬운 건 다들 목소리가 크다 보니 진짜로 필요한 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따로 요청한 적 없지만 배려심 넘치는 정보 생산자와 유통 플랫폼은 혹시나 내가 씹지도 않고 뱉을까 더 부드러운 음식 만들기 경쟁도 시작한다. 스크롤을 내리지 않고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게 ①, ②, ③을 달아 글 맨 꼭대기에 세 줄로 써주기, 백 분짜리 영화 볼 시간이 없는 사람을 위해 만든 십 분짜리 요약 영상, 그 영상조차 빨리 봐야 할까 봐 만든 두 배속재생 기능, 오 초씩 뒤로 넘기는 기능, … 볼지 안 볼지, 살지 안 살지, 내 고민 시간을 줄이는 게 일생의 목표인 양 씹어주다 못해 믹서기에 간 수준의 이유식을 만들어준다.
정보에 파묻히면 사람도 정보로 보이게 된다. 틴더 같은 데이팅 앱은 사람을 손바닥 크기로 압축해 준다. 얼굴 사진 몇 장에 MBTI라든지, 반려동물 여부, 좋아하는 운동 따위 텍스트 몇 줄로 내 연인 자리를 향한 오 초 내외의 예선이 치러진다. 마음에 들면 오른쪽, 별로면 왼쪽을 향해 휙 하고 손가락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어림잡아 무게는 얼마나 될지, 껍질은 매끈한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내려오는 오렌지들을 분류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넘기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오고, 내일이면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내려온다. 정이 없어 보여도 현대인은 위의 알람들로 매우 바쁘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법이다. 만일 한 명씩 붙잡고 진지하게 <그>라는 세계를 알아내고 싶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초등학생이 그린 보물찾기 수준의 지도가 완성될 때쯤 뜨개질 동호회나 게이트볼 연합회 같은 곳에서 가입 연락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에 누군가를 담는 건 무척 쉬운 일이다. <배신자>, <코미디언>, <뻔뻔한 놈>, … 와인도 마찬가지다. <시군요>, <떫은맛입니다>, <별론데요>, <이건 좀 상한 것 같군요>, … 반대로 어떤 것을 상세히 표현하는 일은 고된 작업을 요구한다. 누군가에게 매우 안 좋은 일을 겪어 분풀이를 하는 게 아니라면,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십 분 이상 떠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누군가는 맥거핀이니 누벨바그니 난해한 용어와 함께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엄청 재밌어요>에서 끝나는 것과 같다. 아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서로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이 알고 싶어지는 그 감정을. 기다리던 음식이 마침내 나왔을 때 작게 들이마시는 그의 숨소리부터 운동화 끈을 묶을 때면 입꼬리 위에 혓바닥을 살짝 올려놓는 습관까지. 발견한 정보를 카드에 적어 수납할 때마다 느껴지는 두근거림, 그에 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감, 그것들이 쌓여 다시 사랑을 만든다. 그 사람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많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참으로 사랑할 시간이 없는 시대다. 아니면 사랑할 시간을 주지 않는 시대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싶어 하는 악당의 부탁을 들어주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상황이니 운명이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거대한 힘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도 다 사연 있는 사람이었고 <그럴수도있지>하며 주인공이 공감해 버리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빨리 그를 무대에서 치워버리고 새로 개발한 다음 악당을 등장시키고 싶다. 그래야만 악당을 생산하는 컨베이어벨트가 막힘없이 돌아갈 것이다. 주인공 옆에서 그런 이야기 따윈 듣지 말고 당장 총으로 쏴버리라 말하는 조연이 있다면, 그가 바로 자본주의의 비밀 하수인이다. 그러나 악당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있었다며 품에서 겹겹이 봉한 편지를 꺼내 주인공에게 건넨다면 받은 편지를 눈앞에서 불태울 사람이 몇이나 있으랴. 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늘 그렇듯 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암살을 위해 잠입한 스위스에서 작은 곰 인형을 사서 보냈는데 잘 받았는지 궁금하다, 가끔 전송되는 네 영상에서 본 너의 미소는 햇살 같았다, … 보나 마나 내용은 하나뿐인 딸에 대한 형편없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구구절절한 고백일 테지만 말이다.
아는 일과 사랑하는 일, 양쪽에서 날아온 화살이 편지 한 가운데를 꿰뚫는다. 편지를 쓰겠다는 것은 너를 더 알고 싶다는 것이다. 수많은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이 중에, 수많은 파란 자전거를 타는 아이 중에, 수많은 세 살 남자아이 중에, 그 속에서 너를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고작 읽을 줄 아는 글자가 <약>과 <P> 뿐이어도 어떠랴. 흔하디흔한 단어에 잘려 나간 오직 하나뿐인 너의 풍부함을 내 속에 그리는 일이니. 그저 자동차를 좋아하는 세 살 남자아이로 너를 생각하는 일은 <일반>이란 팻말이 꽂힌 모래사장에 너를 파묻는 일과 같으리라. 이런 매몰의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두 장(두 장이면 충분하다)을 들고 화장실 문을 잠근 다음 변기에 앉아 그에게 실컷 편지를 쓴 뒤 이유 없이 물을 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