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낮게 난다. 구름층이 두터워지고 멀리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지하철 입구로 들어서는데 따뜻한 온기가 훅 올라온다. 사람들을 둘러보니 늦여름, 초가을, 완연한 가을이 옷차림에서 묻어나온다. 날씨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새들의 몫인가 보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리드미컬한 흔들림에 영혼까지 흔들리는 중이다. 머릿 속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 중이다. 어제는 테드 번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연쇄살인이란 개념을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각인시킨 세기의 악인, 테드 번디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나는 범죄물 오타쿠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완벽한 실패를 이해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다가 인간이 악해지는 건지를 알기 위해서 범죄 소설과 프로파일러의 분석, 범죄 심리, 이상 심리 관련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범죄자들의 공통점을 찾고, 그게 그들의 실패 요인인지 살펴보곤 했다. 테드 번디 다큐멘터리에서 발견한 특징도 범죄물을 읽으면서 자주 보던 것이다. 범죄자들은 어릴 때,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은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한 사회성 형성의 실패는 예정된 거고, 중요한 것은 회복의 방식인데, 이들은 사람들과 소통할 줄 모르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간다. 특히, 연쇄살인범들이 그랬다. 테드 번디 역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어린 시절을 미화시킨다. 그는 자신이 '잘나가는 애'였다고 거짓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제 자신의 모습을 무의식에 억압하고, 만들어진 자신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그로 인해 자기애가 높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여 청년기에는 제법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하려고 하는 일들은 뭐든지 실제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성공을 할 때가 아니라 실패를 경험할 때였다. 그는 여러 번의 실패를 했고 그걸 지켜 본 첫사랑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버렸다. 버림받은 테드 번디는 혼란을 느꼈고, 그 후, 살인을 저질렀다.
대부분의 범죄자나 정신 질환자들이 실패와 고통에 약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테드 번디도 그랬다.
나는 이들이 어린 시절에 '언어 장애'를 겪었다는 사실에 관심이 갔다. 이들은 실패나 고통이 오자 성공적인 가면 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언어 장애와 사회성 부족으로 삶과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극도의 혼란으로 말이다.
많은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자아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이야기라고 말한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책에서는 기억에 관해 이런 설명을 하는데, 이 설명은 자아를 설명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보통의 기억은 모든 심리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위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말하는 행위이다. 어떤 상황이 만족스럽게 청산되려면 단지 우리의 행동을 통한 외적 반응뿐만 아니라 내적 반응까지 달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지정한 어휘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상세히 설명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그리하여 상세한 설명이 개인사의 한 장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달성된다."
이와 같이 자아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테드 번디의 어린 시절, 실패에 대한 기억은 자아에 이야기로 통합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또 다시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 당시의 수준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다. 바로 혼란 말이다. 테드 번디는 첫사랑과 헤어진 후 완벽한 자아상에 금이 갔고, 실패를 극복하는 자아 정체성이 약했기 때문에 감정에 휩쓸려 버렸다. 그리고는 첫사랑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녀와 닮은 여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테드 번디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자신의 범죄에 관해선 말을 아꼈다. 그래서 기자는 꾀를 내어 그에게 당신은 심리학을 전공했으니 진범(사실은 테드번디)의 범죄 심리를 분석해 보라고 권유한다. 이 이야기에 낚인 테드 번디는 '그'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강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물로 흘러 힘차게 흘러가듯이 살인의 발단 또한 지극히 하찮을 수 있는 일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중의 하나가 테드 번디의 실패감의 발단이었던 언어 장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지난 오 년간 작정하고 30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 당시 난 이혼하고 직장도 없이 어린 딸만 데리고 있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내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떻게 살아야할 지도 알지 못 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읽은 책에서 '자아는 이야기'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책을 통해서 지금 나의 서사가 끊겼다는 것을 알았고, 내 안에 그 이야기를 이어갈 힘이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설명해줄 언어를 찾아서 작정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서를 통해서 언어의 힘이 생기고, 내 삶은 조금씩 이해되면서 기워지고, 이어져 갔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언어 장애를 겪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인생은 때때로 엄청난 난관일 것이다. 그렇다고 장애가 무조건 범죄나 정신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더러는 최악의 삶을 선택하게 되고 만다.
요즘은 맑은 날을 보기 힘들다. 그리고 유례 없는 더위도 그렇고 경험해 본 적 없는 날씨 변화로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 변화와 사계절의 계절 변화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인신 공양을 하는 기우제를 드리거나, 하늘의 일이 무서워 벌벌 떨지는 않는다.
테드 번디가 저지른 살인의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그가 세상을 원망하는 덴 인신공양을 하는 기우제만큼이나 비과학적이고, 절박한 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책과 같은 간접 경험의 폭도 적었던(테드 번디의 이야기에 책을 좋아했다는 회상은 없었다.) 그가 혼자 고립되어 키운 환상이 악마를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사회복지사로서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많은 범죄자들은 어릴 때부터 복지기관과 정신병원을 오갔다. 또는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문제 많은 아이들에게 유복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언어 치료와 독서 치료, 사회성 치료를 병행하는 한 편, 안전한 가정으로 안심하고 돌려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완벽한 환경을 가지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권한다. 쉽고, 흥미로운 책들을 많이 읽는 것을 어렵고, 좋은 책을 간신히 읽는 것보다 추천한다.
테드 번디도 한 때는 어린 아이였다. 남들보다 극성스럽고 사악한 아이였지만 그만큼 불행한 아이였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다. 구조 신호를 보낸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분명히 그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 때, 그가 책을 읽었다면 책은 절대로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책은 가장 친절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이자 롤모델이고, 심리치료사이자, 사회복지사이다. 오래전부터 책은 외롭고, 불행한 어린 아이들을 구원하곤 했다.
테드 번디는 단지 우울한 집에 있기가 힘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길 위로 밀려나 나쁜 것들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린 테드 번디가 길 대신에 도서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동화책을 읽으면서 자라 언어 장애를 그럭저럭 극복했다면?그리고 인생의 난관마다 책을 통해 답을 찾고자 했다면? 만약 어린 테드 번디가 찾아간 도서관의 사서가 나이고, 나에게 어떤 책을 추천할지 물어봤다면 이런 책들을 한번쯤은 권하고 싶다. 이 책들은 테드 번디를 거울처럼 이해해줄 것만 같다.
마리오 푸조의 대부 시리즈와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