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가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두 사람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잠깐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연희는 서서이 정신이 돌아왔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늘 기대하던 대로 되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해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연희는 남편과 정부의 뜨거운 피로 두 손을 적시고 나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내가 정말 끝장내고 싶었던 사람은 남편과 그의 정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음을. 내 머릿 속에서 맴돌던 생각과 심장을 저미는 고통이었음을. 그러나 고통은 그들과 함께 죽지 않고, 내 심장 속에서 여전히 고동치고 있었다. 연희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일본도를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
“이 시간에 왠일이야? 무슨 일 있니?”
“아냐.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무슨 일 있구나. 연희야. 이서방이 또 속썩였니?”
“아니. 엄마.”
“왜”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사랑해?”
“그럼. 엄마는 무조건 네 편이야. 이혼해도 엄마는 안 말려. 알았지?”
“엄마. 그럼 내가 살인자라도 날 사랑할 거야?”
“연희야. 많이 힘들어? 엄마가 지금 갈까?”
“아니, 대답해줘. 내가 살인자라도 날 사랑해?”
“그래. 네가 이서방을 죽인대도 나는 안 말린다. 하지만……”
“하지만, 뭐……”
“내 딸이 꽃다운 나이에 그놈 때문에 인생을 조지는 걸 엄마가 또 봐야겠니? 이서방 죽이고 싶을 땐 말해. 엄마가 대신 죽여줄게. 엄마는 지옥가도 괜찮아. 안 무서워. 하지만 너는 그러지 마라. 알았지?”
“엄마…… 끊어. 잘래.”
“그래. 푹 자고 내일 볼 수 있으면 보자. 알았지? 엄마가 맛있는 것 사줄게.”
“어.”
연희는 핸드폰을 그들이 누워 있는 침대 옆 화장대에 그냥 놓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쇼파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와의 약속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엄마를 안을 수 없을 것이고, 엄마에게 위로받지 못할 것이며, 엄마의 얼굴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절망이 낙인처럼 새겨질 것이다. 잘못한 사람은 남편인데, 어째서 고통받는 사람은 나일까? 연희는 모든 것이 너무 버거웠다. 몇 번이나 이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해주지 않았고, 연희는 두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었다. 그런데 연희가 출장을 다녀온 사이에 두 사람이 부부의 침대에서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정이 틀어져서 조금 일찍 돌아온 연희는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죽이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희가 소리를 지르며 남편과 여자를 침대에서 끌어내리려고 하자 남편은 연희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연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개 취급하듯 쓰러진 연희를 발로 툭툭 차면서 꺼지라고 말했다. 연희는 거실로 나가서 남편이 아끼던 일본도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냥, 이대로는 내가 다신 나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발로 차던 내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이혼하는 것조차 남편에게 좋은 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이 사는 것도 끔찍했다. 연희는 이 더러운 것들을 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미친듯이 화가 나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연희는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지친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연희는 울 기운조차 없었다.
딩동
누구지? 연희는 경찰이 온 줄 알고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경찰이 어떻게 알고? 아직 경찰이 올 때가 아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머리가 핑 돌았지만 간신히 추스르고, 부부 방의 문을 닫았다. 그러나 자신의 꼴을 보니 온통 피투성이여서 결국 문을 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있기로 했다.
“연희야, 엄마야.”
“연희야, 너 있는 거 알아. 얼른 문 열어.”
엄마? 엄마가 도대체 왜 왔을까?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엄마 품에서 울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 괜찮아. 엄마는 다 이해해. 그러니까 열어.”
어릴 때부터 연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는 귀신같이 알아챘다. 이번에도 그 촉으로 온 걸까? 문을 열어도 될까?
“엄마, 추워. 얼른 문 열어.”
연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자 엄마는 누가 볼새라 잽싸게 문을 닫고 들어오더니 연희의 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연희를 꼭 안아주고, 다독여 주었다.
“우리 애기, 괜찮아. 괜찮아. 무서웠지?”
연희는 엄마 품에서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엄마가 왜 왔는지 깨달았다.
“엄마, 안돼.”
“아니야, 연희야. 엄마는 네 덕분에 좋은 인생 잘 살았어. 이제 남은 여한이 없다. 그저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 말이야.”
“내가 잘못한 건데 엄마가 왜!”
“연희야. 너 대학도 끝마치고 싶고, 프랑스도 가 보고 싶다고 했지? 그러려고 열심히 아르바이트 했었잖아. 너 아르바이트하던 회사에서 이서방 만났을 때, 대학도 보내주고, 프랑스로 신혼 여행도 가자고 해서 얼마나 좋아했니. 하지만 모두 빈 말이었고, 어린 널 데려다놓고 이서방이 얼마나 고생만 시켰니. 나는 이제라도 네가 대학도 가고, 프랑스도 갔으면 좋겠어. 열심히 일해서 네 꿈을 하나씩 이루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너 시집가서 고생하는 것 보고 엄마는 늘 이 생각뿐이었어.”
“엄마, 난 사람을 죽였어.”
“아니야. 내가 죽인 거야. 너는 출장을 갔다가 너무 늦게 돌아왔고, 너희 집에 김치를 주려고 들렀다가 이서방 꼴을 본 내가 저지른 일을 알게 된 거야. 그리고 경찰에 자수하라고 날 설득해서 우린 그렇게 하게 될 거야.”
“엄마……”
“엄마는 너 감옥 보내면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셔. 결국 죽을 텐데 같이 죽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니! 엄마가 너 대신 갈게. 그리고 너는 엄마가 기대한 행복한 딸이 되어줘. 지난 일은 다 잊고, 열심히 살아. 그러면 돼.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질 거야. 맨날 속상한 일 곱씹지 말고, 하루 하루 감사할 일을 찾아가며 작은 일에도 만족해가며 그렇게 살아.”
“……”
“연희야, 사랑에 한 번 실패했다고 사람 무서워하지마. 그리고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 땐 일찍 결혼하지 말고 삼 년은 사귀어 보고, 동거도 하고, 그러다가 헤어지기 싫으면 결혼해서 돈 열심히 모아서 애도 낳고 그렇게 살아.”
“엄마……”
“너 결혼하고 예쁜 옷도 못 입어봤지? 엄마 집에 적금 통장이 하나 있어. 그거 너 줄게. 옷도 여러 벌 사고, 화장도 좀 하고, 머리도 좀 해라. 그리고 일은 계속 하도록 해. 엄마도 평생 일하면서 살았잖아. 내 힘으로 돈을 벌어서 나랑 너 먹고 산 게 엄마의 기쁨이었어. 그리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 일하면서. 너도 그럴 거야. 내 딸, 사람들 피하지 말고 살아. 당당하게, 알았지?”
“안돼……”
“연희야,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건 그냥 저절로 되는 게 아니야. 열심히 열심히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만 해. 약속할 수 있어?”
“엄마, 응, 엄마, 미안해.”
슬픔이 비둘기처럼 날아오른다. 아무 고민 없던 시절은 완벽하게 지나갔고,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순수와 찬란은 지나갔고, 비겁과 경멸이 찾아왔다. 아침에 커피를 마셨던 잔이 지금은 차갑게 식었듯이 뜨거운 시절은 영원하지 않았다. 인생은 변덕스럽고, 조잡하고, 항상 실망스러웠다. 그토록 아름답던 모든 것들을 어째서 시간은 모두 망가뜨리는 걸까? 처음처럼 한결같이 살아갈 순 없는 걸까? 꿈꾸는 대로 이룰 수는 없었던 걸까? 유년기에 내 귓가에서 속살대고, 내 마음을 간질이던 미래는 때때로 찾아왔다. 하지만 금방 부서지고, 마모되어서 아예 없었던 것보다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다. 차라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불행을 배우진 않았을 것이다. 가슴 속에 불행의 기억이 너무 많아서 버겁고, 지쳤다. 숨을 쉬는 일조차 힘들다. 하지만 살고 싶다. 진심으로 살고 싶다.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뿐이 안 들었다. 연희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 지 깨달았다. 엄마를 끌어안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