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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네 Oct 18. 2024

<흑백요리사>의 언어와 예술 ②재료

들기름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 평생 들기름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물론 귀가 트이지 않아 신들린 무당이 대신 읊어준 소리로 들었다. 그 신은 요리의 신이고 무당은 당연히 최강록이다. 


<흑백요리사> 제4화, 최강록의 인터뷰 중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중 1:1 흑백대전에서 최강록이 맞닥뜨린 재료는 들기름이었다. 무침이나 소스에 가볍게 활용되는 들기름을 주재료로 활용해야 하는 어려운 미션이었다. 최강록은 들기름을 두루 사용하여, 먹는 동안 내내 "나야, 들기름"이라고 속삭이는 요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요리사가 재료와 얼마나 깊이 교감하는지, 들기름에 '빙의'하는 최강록을 보며 알았다. 


예술의 재료는 장르에 따라 다양하다. 문학의 재료는 언어다. 음악의 재료는 소리와 시간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의 재료는 공간을 차지하는 물성(物性)을 지닌다는 점에서 요리 재료와 상대적으로 비슷하다. 그림은 종이나 캔버스와 같은 바탕 위에 먹, 각종 물감, 연필 등으로 그린다. 조각은 돌이나 나무 등을 깎거나 파낸다. 개념미술이 등장하고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며 미술에서도 작품의 탈물질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카메라 없이도 사진 같은 이미지를 뚝딱 만들고 방구석에서 마우스를 클릭거리며 영화를 만드는 것조차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미술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속성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즉 미술에서 재료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재료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은 작품의 성패를 가른다. 전통적으로 동양화가 먹으로 종이나 비단 위에 그린 그림이라면, 서양화의 대표적 재료는 캔버스와 유화물감이다. 먹은 종이나 비단에 스며드는 온화한 성격이지만, 유화물감은 스며들지 않고 캔버스 위에 얹히는 재료로 물성의 자기주장이 강하다. 학교 미술시간에 흔히 다루는 수채화는 종이에 스며드는 색채의 투명한 물맛을 얼마나 살리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수채물감을 몽창 얹어서 불투명한 물성과 질감을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수채물감으로 유화물감의 묵직한 무게감을 능가하긴 어려우며 수채화 본연의 특성이나 강점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흑백요리사>의 1:1 흑백대전은 흑백요리사가 한 명씩 짝을 이루어 같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 실력을 겨루는 방식이었다. 홀수의 심사위원이 손쉽게 다수결로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 아니어서, 심사결과가 1:1일 경우 두 심사위원이 토론을 거쳐 승자를 결정했다. 흑백요리사의 대결과 더불어 두 전문가가 음식에 대한 철학과 언어를 겨루는 이중 대결 방식은 음식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다. 박빙으로 판가름이 난 경우가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폴리 맛피아와 파브리의 홍어 대결은 흥미로웠다. 두 심사위원이 1:1로 판결한 후, 안성재는 파브리의 홍어 튀김에 대해 감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생선을 튀겼어도 전 이 맛이 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두 심사위원 모두 홍어 삼합을 재해석한 파브리의 홍어 튀김이 맛있다는 데  동감했다. 그러나 다른 생선을 튀겼어도 같은 맛을 냈으라는 안성재의 논평은 파브리의 요리가 홍어에 특화된 맛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음을 에둘러 표현한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불가능한 재료 본연의 고유성을 끌어내는 것은 요리와 예술의 공통과제인 셈이다. 


"요리는 부엌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큼이나 부엌 바깥에서도 이루어져요."

     -에드워드 리,  다큐멘터리 <요리사 에드워드 리의 이야기: 미국남부 요리와 한국 요리의 비밀을 풀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3hxPwZ2YZ1c


준우승한 에드워드 리의 요리철학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요리사 에드워드 리의 이야기: 미국남부 요리와 한국 요리의 비밀을 풀다(Chef Edward Lee's Story: Unlock Southern & Korean Cuisine)>(2024)에서 에드워드 리는 음식의 출발점으로 소를 키우는 사람들과 야채를 수확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요리는 요리사가 부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부엌 밖에서 음식의 재료를 돌보는 동안 이미 시작된다는 것이다. 안성재는 참가자 '셀럽의 셰프'가 만든 채식 요리에 대해 "우리 땅에서 자라는 채소들을 최대한 맛있게 예의를 갖춰서 다루자"라는 마음이 느껴졌다고 호평했다(제3화).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한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종이에, 목탄에, 캔버스에, 물감에 얼마나 예의를 갖춰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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